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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커넥션

마음닦기/독서

by 빛살 2026. 2. 14.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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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커넥션/존 라이크만, 김재인/현실문화연구/2005.8.10.

존 라이크만(John Rajchman)이 쓰고, 국내의 대표적인 들뢰즈 연구자인 김재인이 옮겼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훌륭한 입문서이자 안내서라고 하지만 배경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읽기가 쉽지 않았다.
플라톤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구 철학은 '동일성'을 중시해 왔다. 이들은 현실의 수많은 차이와 변화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하나의 동일한 원리로 환원시키려 했다(본질주의- 신 중심, 위계적). 들뢰즈는​ 고정된 틀(동일성)에 갇히지 말고 존재마다 가진 고유한 차이를 긍정하며, 그 차이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생성의 운동에 주목할 것을 강조한다(중심이 없으며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
우리는 보통 어제와 오늘의 꽃을 같다고 보지만(동일성), 사실 그 꽃은 매 순간 엄청난 차이를 품고 있다. 이처럼 동일성이란 착각일 뿐이며, 차이들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펼쳐지는 것이 진정한 세계의 모습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속 기억이나 음악의 리듬처럼, 겉으로는 반복되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섬세한 차이들이 만들어내는 울림이 존재의 근원적인 모습이다.
제목처럼 들뢰즈 철학의 핵심은 '연결'이다. 여기서의 연결은 고정된 질서나 통일성을 갖춘 구조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뻗어나가는 '예측 불가능한 연결'을 말한다. '차이의 철학'과 '생성(Becoming)의 철학'을 통해 기존 서양 철학의 전통적인 개념들, 특히 동일성, 재현, 초월성 등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유 방식을 제안한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 연결접속들
​2. ​실험(Experiment): 철학은 이미 있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실험'이어야 한다.
3. 사유(thought)
4. 다양체(Multiplicity): 중심이 하나인 통일된 전체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있는 상태 그 자체를 긍정한다.
​5. 삶(Life): 철학은 텍스트 안에 갇힌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생명력을 긍정하고 확장하는 도구여야 한다.
6. 감각(Sensation): 논리나 이성만큼이나 '감각'과 '예술'을 중요시 했다.

<​​커넥션: 종합, 생성의 논리>
이 세상에서는 전지적, 초월적 시점이 불가능하며 이를 들뢰즈는 '내재성' 이라는 말로 부른다. 내재성의 관점에서 생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의 삶' 의 관점에서 그것을 이해한다는 말이다. 삶은 전지적으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삶은 한 순간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만듦' 즉 '만들어짐'과 '만들어감'의 과정이다.(7)
<종합, 생성의 세 양상>
1) 연결접속 종합: A 그리고, 그 다음에는 B라는 형식을 지닌다. 어디에도 초시간적인 자기 동일성을 지닌 존재는 없다. 생산의 생산.
2) 분리접속 종합: 영원회귀(니체), 반복은 '~이거나~이거나'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며, 그 (시간적) 사이에 억압이 존재한다. 이 때 억압은 생산(즉 생산의 생산)으로 표현되지 못한 것 전부의 다른 이름이다. "이것이거나 아니면 '그 다음에' 저것이거나" 하는 식으로 종합이 일어난다.  
3) 접합접속 종합: 영원회귀의 가장 깊은 비밀은 '긍정' 에 있다. 바로 이 긍정이 접합접속이 의미하는 바다. 긍정이란 흔한 오해처럼 追隨가 아니다. 긍정은 생성의 향유, 즉 (생성의) 소비의 생산' 이다. 주체가 탄생하는 것은 바로 이 시점이다. 주체는 생성을 향유하는 자로서 생성의 주변에서 생성의 완료(그러나 잠깐 그런 것이지 결코 끝은 아니다)될 때 겨우 등장한다. 생성에 접합하는 자, 시간을 받아들이는 자가 주체인 것이다. 니체의 말처럼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는 최고의 긍정의 형식"인 것이다. 주체는 긍정하는 자라기보다는 긍정이 만들어내는 자다. 이런 점에서 생성의 사상은 최고의 유물론적 사상이다.
"진짜로 꿈을 꾸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증명하고자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다."- 프루스트
들뢰즈는 전통 논리적 의미와는 반대로, 대부분의 조직 형식들에 비밀리에 수반되는 비결정 지대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사유가 이 지대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다. 왜냐하면 사유한다는 것은 실험한다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판단(=심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23)

* 연결접속은 "경험론" 또는 "실천주의"라 불릴 수 있는 사유 스타일을 요구한다.(24)
연결접속이 만들어질 수 있는 지대를 위해 들뢰즈가 철학사에서 찾아내는 개념은 스피노자(Baruch Spinoza)의 '실체(Substance)'와 니체의 '삶(Life)이다. 그리고 들뢰즈는 1960년대에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스피노자와 니체 각각에 대한 천재적인 해석을 발전시켰고 그러면서 그 둘을 함께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시켰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에게서 "조직이나 발전의 판"에 앞서는 "조성판(plan of composition)"을 찾아내며, 니체에게서는 동일성에 앞서며, 경계나 울타리에 대한 유목적 관계를 통해 주어진, 가벼운 또는 탈영토화된 대지(Earth)'를 찾아낸다.(38)
연결접속한다는 것은 긍정하는 것이요, 긍정한다는 것은 연결접속하는 것이다.(39)
니체 자신은, "나는 많은 길들로, 많은 길들에 의해 나의 진리에 왔다..... 왜냐하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란 없으니까"라고 선언할 때, 방랑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방식으로 경험론자인 동시에 유목민이 되었다.(57)

스피노자는, 가장 나쁘고 가장 다루기 힘든 증오나 폭력은 헌신에서 나오며 헌신의 이름으로 영속화되는 증오나 폭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의 특이한 경험론 또는 실험주의가 발견하는 자신의 假定과 주소지는, 바로 이해관계들과 그것들의 조직화보다는 그러한 정념들과 과정들 안에 있는 것이다. 그 경험론 또는 실험주의가 우리에게 호소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자연을 벗어나 등장한다고 상상하는 종류의 상호 인지 가능한 주체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독자적이고, 형식화되지 않고, 신화나 "다수파의" 모델이나 역사가 없으며, 아직 발명되어야 할 사회들의 "구성"에 선행하는 일종의 아직 불확정적이거나 미확정적인 "多衆(multitude)"으로서다. 철학이 자신의 경험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그러한 "도래할 민족"에 대한 호소 안에서며, 그러한 "미래에 대한, 미래의"-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미지의 자에 대한 - 믿음에 대한 호소 안에서다. 그리고 틀뢰즈의 경험론이 철학의 비밀이 되는 것은 철학을 이러한 지점으로 밀고 간다는 데 있다.(66)

철학의 문제들을 보거나 보여 주는 기술은 사유의 이미지들의 구성과 함께 간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특히 "재현"이라는 가상들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넓은 의미에서 제1존재(또는 분명한 관념)와 그 (대상들의) 예증들 간의 "모방적" 연관이 실재한다는 생각은 "오류'의 원천인데, 그 오류의 "우화"에 대해서는 니체가 유명한 언급을 한 바 있으며, 제임스는 그것을 "진리의 모사 이론copy theory"이라고 경멸
했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담론"이라는 가상 (문제들을, 그리고 문제들을 보는 것을 명제들이나 테제들과 혼동하는 것), "영원한 것"이라는 가상(개념들이 발견된 것이 아니라 창조되거나 생산되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 "보편적인 것"이라는 가상(제1존재나 분명한 관점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 자체가 항상 설명될 필요가 있는 것인데도, 오히려 그것들이 사물을 설명한다고 생각하는 것) 등을 덧붙인다. 그러나, 들뢰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이 모든 가상들을 그 자체로 "초월성"이라는 위대한 가상의 변이형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이 가상은 우리가 제1존재나 제1관념을 철학이 전제하는 '내재성의 판" 위로 다시 도입해, 그 내재성의 판을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선행하는 어떤 것의 내재성으로 만들 때 생겨난다. 이 모든 변이형 속에 있는 초월성의 가상을 흩어놓을 때만, 그래서 철학이 그 자체로 "사유의 독단적인 이미지"에서 해방될 때만, 철학은 진실로 실험적인 것이 되며, 그 "근본적 경험론"을 이룰 수있다.(73-4)

어리석음을 공격한다는 것은 오류를 교정하고 미신을 쫓고,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일과 같은 일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탈신비화"가 아니며, 더 고차적인 과학도 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목표는 새로운 힘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정식화하고,  그 힘들을 둘러싼 일종의 실험적 사유 활동을 고무시킴으로써, 새로운 힘들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푸코가 말했듯이, 어리석음의 반대는 지성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 또는 철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90)
- 초월성이나 원체험을 신뢰하지 않고 사유가 비롯되고 그것이 효력을 미치는 세계를 신뢰한다.

들뢰즈에게서 "논리"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그것은 들뢰즈가 밝히고자 하는 "사유의 이미지"에 잘 맞는 새로운 것들을 요청받는다. 그것이 곧 "다양체"의 논리, 의미의 논리다.(97)
경험론에 영감을 받은 들뢰즈의 논리는 "술어와 진리의 논리"라기보다는 "의미와 사건의 논리"다.(97)
들뢰즈의 논리는 사유와 삶 그 자체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논리다. 정말로 들뢰즈가 철학의 전통에서 뽑아내고자 하는 것은 정확히 삶에 대한 '실천적' 물음이다.(99)

다양체라는 들뢰즈의 관념은 "여럿(多)"이나 "잡다(manifold)"나 "다양함"이라는 전통 개념들과 혼동되어서는 안되며 다른 종류의 논리적 연산을 요청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특수성과 대조되는 "독자성"을 말하며, "일반성"과 대조되는 미규정적 "조성판(=구성판)"을 말한다. 이 판에서 독자성들은 합착하거나 한 데 모인다.(104)
들뢰즈는 어떠한 "다양성"도 단순한 무질서도 아닌 논리적인 "離隔"에 대해 말한다. 즉, 들뢰즈가 말하는 "이격화"란 공간을 서로 구별되는 부분들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어떤 것이 나타날 수 있게 우연을 허용할 수 있도록 공간을 분산하거나 흩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배치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러한 "자유로운 차이들", "이격들", 또는 "독자성들"인 것이다.(106)- 원자(세포) 안의 빈 공간
다양체의 논리: "식별 불가능의 지대들"과 더불어 작용하는 접속사를 밝히려는 시도. 이러한 기본적인 논리적 연산자는 술어나 동일성인 "이다"에 앞서 작용하는 "그리고"가 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난 일 - 안에는, 항상 "무언가에 귀속시킬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하며, 그것은 그러면서도 우리의 "생성들"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109)

이 논리적 "결여"는 그 자체로 끝이 아니며, 오히려 사물들을 사유하고 연결접속하는 또 하나의 방식 - "존재하는 것"과 상이한 관계를 갖는 또 다른 종류의 논리적 건축 - 의 귀결이다.
들뢰즈의 용어법에서, 독자성은 "계열"로 들어가는 것이며, 계열은 하나의 집합이나 유기적인 전체와는 반대로 "독자성들"로 구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자성은 항상 중간에서 다시 시작한다.

라이프니츠와 주름에 관한 책에서 들뢰즈는 다양체란 많은 부분들을 갖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복합된" 것, 즉 계속 갈래길만 나오는 정원에 대한 보르헤스의 우화에서처럼, 완전히 펼쳐진 상태란 없고 단지 더 이어지는 갈림만이 있는 것처럼 여러 번, 여러 방식으로 접힌 것이다.(115)

사유는 항상 그것의 분기들과 복잡화들을 제한하거나 봉쇄하는 권력들에 대항한다. 그것은 항상 다른 종류의 권력들을, 현실적인 권력보다 역량을 다룬다.(135)

라이프니츠는 가장 좋은 세계란 "조화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가장 단순한 법칙들을 위한 최대치의 다양성을 고려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조화를, 차이들을 한데 모으는 "불협화음(dissonance)"의 가능성이라는 견지에서 보아야만 한다. 들뢰즈가 어디선가 그것을, 도시 안에 있는 많은 도시들과 항상 다른 도시라고 했다. 우리가 가장 좋은 세계는 가장 큰 잠재성을 갖는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의 원칙이 갖는 충만한 힘을 보는 것은 오직 그때뿐이다.(137)
들뢰즈는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에서 흥미로운 것은 더 이상 그 어떤 구원론에도 종속되지 않는 "신뢰와 진리"의 문제를 도입하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것은 사유의 이미지 안에서, 판사의 모습을 실험자의 모습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 실험자는 결코 주어지거나 "조건 지워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들어지고 있는 자아와 관련해, 세계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자다.(139)

동일성보다는 다양체의 견지에서 생각하는 것, 그리고 다양체를 만들거나 건설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인격, 행위, 믿음 등 실천적 개념들의 폭을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144)

우리는 어떤 "순수한" 종, 인종, 심지어 성으로 전적으로 나뉘어 있지는 않다는 뜻이며, 우리의 삶은 사실 그런 순수한 계급이나 유형의 "개체화"로 환원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분명한 종 또는 지층 또는 계급에 맞추어지기 전에 우리는 일종의 불특정의 군중 또는 "다중"을 구성한다.(145-6)
들뢰즈에게 한 사회는 계급 모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분명한 계급으로 나뉘지 않은 "다중"의 포텐셜을 드러내 주는 "도주선"에 의해 규정된다.

"하나의 삶"은 항상 독자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체 이전의" 또는 "개체 이하의" "독자성"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래서 이것들은 영어에서 "it's raining"의 "it"처럼 비인칭적인 "판"에서 다른 독자성들과 연결된다. 이 판이 삶의 독자성의 조건인 것이다.
"하나의 삶"의 모호함은 따라서 교정되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가능성들, 우리의 연결접속들의 원천 또는 저장고다.(151)

여성해방 운동의 진짜 힘은 그들의 성과 거기에 속한 권리를 특정하게 명시하는 주장을 했다는 점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현실적으로 성의 장치 안에서 행해진 담론에서 빠져나왔다는 점이 진짜 힘이다.(160 주, 미셀 푸코)

하비투스(Habitus, 아비투스)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정립한 개념으로, 개인이 자라온 환경과 계층에 의해 몸에 밴 '제2의 본성' 혹은 '체화된 습관'을 뜻한다. 

퓌시스(Physis)는 '성장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 'phuein'에서 유래한 고대 그리스 철학 용어로, '자연(라틴어 natura -> Nature)'을 의미. 인위적인 관습(Nomos)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본질적인 본성, 사물의 내적 원리, 만물의 근원이 되는 자연적인 상태를 뜻한다. 

"우리가 이미 볼 수 있는 것을 재생산하지 말고,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들라. 왜냐하면 모든 예술에는 코드와 주체의 형성 이전에 오는 것의 폭력이 있으며, 그 폭력은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말하고 보는 표현적 재료의 조건이기 때문이다.(210)
화가는 빈 캔버스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으며 작가는 빈 페이지에서 글을 쓰지 않는다. 페이지나 캔버스는 이미 미리 존재하는, 미리 설립된 클리셰들로 덮여 있다." 이것들은 가능성의 독자적이고 생명적인 공간을 발견하기 위해 반드시 닦아내야만 한다.(213)
그 싸움에는 논리가 하나 있다. 확률에서 가능성을 추출해 내는, 통일성에서 다양체를 추출해 내는, 일반성에서 독자성을 추출해 내는 싸움의 논리가, "하나의 삶"의 논리가. 그래서 미학에 대한 들뢰즈의 더 큰 개념에서 기본적인 문제는 "감각"이라는 바로 그 관념과 그것과 우리의 관계에 즉, "아이스테시스" 라는 바로 그 개념에, 이 "강렬함"의 의미를 도입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각의 "가능성의 조건"을 찾으려 하는 대신에 삶과 사유의 다른 가능성들의 조건을 위해 감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215)
*아이스테시스(Aisthesis)는 고대 그리스어로 '감각' 또는 '감각적 지각'을 의미한다.현대 미학(Aesthetics)의 어원. 오감을 통한 물리적 지각뿐만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인지하는 능력을 포함하며, 자크 랑시에르 등은 이를 예술과 감각 경험, 정치성을 탐구하는 미학적 기반으로 사용한다. 
들뢰즈는 세잔이 인상파에 반대해서 감각은 사물들 자체 안에 있는 것이지 우리 안에 있지 않다라고 말할 때 감명을 받았다.(227)
예술의 목적은 표현적 재료를 통해서 습관적인 감각질에서, 다시 말해 지각, 기억, 재인지, 동의 등의 습관에서, 감각을 추출하고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예견되지 않은 방식으로 보고 느끼게끔 만드는 일이다.(228)
예술은 삶의 세계의 구체화라기보다는 낯선 건조물이다. 우리는 변형이나 자기 실험을 통해서만 그 건조물에 거주하며, 마치 새로운 시각체계나 신경체계를 부여받은 듯 새로워진 채로 그 건조물에서 나타난다.(228)
우리가 결핍하고 있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우리는 그것을 너무 많이 갖고 있다) 차라리 생성하고 있을지 모르는 것에 대한, 그것이 우리 자신 안에서 현실화되는 특이한 시간과 논리에 대한, 우리들 서로 간의 관계에 대한 이런 믿음이다. 들뢰즈는, 그것이 바보들을 웃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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