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13릉 - 황제들의 사후 세계
명나라 13명의 황제의 무덤이 있는 곳이 명13릉이다. 하나의 능이 각각 하나의 산에 조성되어 있고, 13개의 능이 내부의 비밀 통로를 통해 서로 이어져 있다고 한다. 능의 크기는 서로 다르며, 재위 기간이 길고 태평성대를 이룬 황제일수록 크고 화려하다. 오랫동안 직접 공사 현장에 와서 시찰도 하고 수정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조(영락제)의 장릉(長陵)이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규모도 가장 크다고 한다.
현재 발굴 되어 개방된 곳은 정릉, 장릉, 소릉 등 모두 3곳. 그중에서도 우리가 찾은 정릉은 13대 황제인 신종(만력제)의 능으로 신종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병을 파견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10살에 등극해 48년간 황제로 있으면서 주색에 빠져 명나라를 파멸로 이끈 인물이다. 자신의 무덤을 건설하기 위해 당시 2년 국고인 800만 냥을 소비하고 3만여 명을 동원해 8년간 일을 시켰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48년간 제위에 있으면서 기록할 만한 업적을 찾을 수 없어 묘지 앞에 글자 하나 없는 무자비(無字碑)를 세웠겠는가.
정릉의 지하 궁전은 전전(前展), 중전(中展), 후전(後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깊이가 27m나 된다. 화려하지도 않고 볼거리도 별로 없어 마치 커다란 지하 동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밖으로 나오면 좌우로 유물 박물관이 있는데 모두 모조품이란다. 가이드에게 진품은 모두 장개석이 대만으로 가지고 갔느냐고 물었다. 이런 무식한! 이 능은 1956년에 발굴되었으니 장개석인들 어쩔 수 있었겠는가. 문화 대혁명 때 파괴 되었다고 한다.
무자비한 획일주의의 폐해를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명13릉 주위에 복숭아밭이 많았다. 안내원이 사주는 복숭아가 먹을 만했다.
돈이 뭐길래 - 보신당에서의 엽기
정릉을 보고 나서 쇼핑하러 갔다. 중국의 정책적인 차원에서 반드시 들려야 한다는 쇼핑 센터. 중국 한약방하면 동인당만 있는 줄 알았는데 보신당도 있었다. 자기네들 말로는 동인당과 쌍벽을 이룬다고 한다. 동인당은 우황 청심환과 호랑이표 연고, 보신당은 화상연고와 결리고 저리는 데 바르는 파스가 유명하다고 했다.
특히, 화상 연고는 화상뿐만 아니라 무좀에서부터 아토피성 피부염까지 거의 모든 병에 잘 듣는 만병통치약처럼 선전이 대단하다. 그러면서 연고의 효능을 직접 보여주겠다며 쇠사슬을 가스불로 달구고 있었다. 잠시 후 흰 가운을 입은 젊은이가 나오더니 자신은 교포3세로한의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으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서 일종의 아르바이트로 이 일을 한단다. 그리고 시뻘겋게 달군 쇠사슬을 맨손으로 잡는다.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눈을 돌려 버렸다. 즉시 연고를 바르고 시커먼 쇠사슬 자국이 있는 손바닥을 가끔씩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우리에게 구경시켜주었다. 시커먼 흔적 말고는 말짱했다.
중국 문화는 좀 비인간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가 누구인가, 바로 교사 아닌가. 배우기 위해서 끔찍한 일도 마다않는 학생을 위해서 쇼핑 대박을 터트려 주었다. 하지만 나는 안 샀다. 아, 돈이 뭐길래.
이장 이황(二長二黃)
드디어 점심 시간. 쇼핑 센터와 맞붙어 있는 건물에서 식사를 했다. 중국식이었는데 먹을 만했다. 특히 반주로 나온 술이 좋았다. 조그만 병에 알코올 도수가 56도나 되었지만 첫 잔을 들이키니 향기가 입안 가득 퍼진다. 그리고 뒷맛이 개운했다.
식사를 마치고 칠보 제품을 구경했다. 색깔이 너무 화려해서 조금은 촌스러워 보였다. 살 것은 없고 시간은 남고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저편에 그림을 전시해 놓은 곳이 있었다. 거의 산수화였다. 우리의 여정에 포함되어 있는 이강의 산수화가 한 점 있었고 황산 산수화가 몇 점 눈에 띄었다. 유산가 중 ‘황산곡리 당춘절(黃山谷裏 當春節)에’의 그 황산이 아닌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그 황산이 그리 유명하단다.
중국 사람들이 가장 가 보고 싶어 하는 곳으로 이장(二長)과 이황(二黃)이 있다. 이장은 장성(萬里長城)과 장강(長江=揚子江), 이황은 황화(黃河)와 황산(黃山). 하지만 황산보다 더 좋은 곳이 장가계라고 설명해 준다. 가고 싶은 해외 여행지 목록에 추가해야겠다.
만리장성 - 문화적 충격
조금은 심드렁한 마음으로 만리장성으로 향했다. 이화원과 명13릉에서 별 감동을 못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달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라는데 과연 어느 정도의 규모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저 그렇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북경을 벗어나자 제법 산 같은 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산세는 점점 험해지고 거용관 조금 못 미쳐서 험산 준령에 장성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거용관을 지나면서 가파른 산 위로 끝없이 펼쳐지는 장성들. 마치 살아서 꿈틀대는 용 같았다. 저절로 터져 나오는 탄성.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쳐다보면 볼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발해만의 산해관(山海關)을 기점으로 북경을 지나 황하를 건너 실크로드의 북변을 따라 서행하면서 감숙성의 가욕관(嘉浴關)에 이르기까지 전장 약 6,700km에 달한다는 만리장성. 중국에서는 5km를 십 리로 친다니까 실제로는 일만 삼천사십 리, 한국식으로 하면 일만 육천칠백오십 리나 된다. 저 산꼭대기에 장엄하게 늘어서 있는 성벽들만 해도 엄청난데 장장 만 리가 넘는다니. 어느 누가 꿈이라도 꿀 수 있겠는가? 장성을 쌓겠다는 발상 자체가 놀랍다고 느꼈다.
팔달령(八達嶺)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사통팔달(四通八達)로 확 트였다. 내가 보기에도 군사적 요충지 같았다. 케이블카를 타고 장성에 올랐다. 밑에서 본 것과는 달리 장성은 폭이 좁고, 산세가 험한 곳에서는 끊겨 있었다. 하지만 사방으로 쭉쭉 뻗어나간 모습이 보기에 장쾌했다. 시야를 가리는 뿌연 안개로 그 끝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직접 와서 보니 달에서도 보인다는 것은 거짓말임이 확실하다.
명13릉으로 가다가 본, 두 발을 쳐든 말을 탄 자세로 북경을 향해 진군하는 모습의 이자성의 청동상이 떠오른다. 그에 대해 자세히는 모른다. 하지만 명나라 때 쌓은 이 팔달령을 넘어 모순에 찬 명 황실을 멸망시킨 사람이라고 가이드에게 들었다.
왜 자꾸 이자성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을까?
용경협 - 소계림(小桂林)
팔달령에서 장성을 구경한 후 용경협으로 향했다. 용경협은 수천 리 떨어져 있는 천하 절경 계림에 갈 수 없는 어느 황제를 위해 명나라 때 협곡을 막아 만들었다고 한다. 최근 들어 중국 정부가 홍콩과 합작하여 관광지로 개발한 곳이다.
버스에서 내려 우리나라의 작은 승합차인 ‘다마스’처럼 생긴 ‘빵빵차’에 옮아 탔다. 북경에서 본 중국인들은 행동이 몹시 느렸다. 특히 공사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 일을 하는 건지 쉬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느리다. 그런데 돈맛을 아는 이곳의 운전기사들은 일 초라도 더 빨리 움직이려고 노상 빵빵댄다. 그래서 빵빵차라고 한단다. 정말 동작이 재발랐다. 5분도 안 되어 용경협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 도착하자 오른쪽 산등성이에 빨간색으로 쓴 龍慶峽(용경협)이라는 거대한 글씨가 보인다. 그 옆에 江澤民(강택민)이라는 작은 글씨도 보였다. 강택민과 용경협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아마 한 번쯤 방문한 것을 기념해서 쓴 게 아닐까 생각했다.
협곡에 70m, 20층 높이의 댐을 막아 그 물위에 유람선을 띄울 수 있도록 만든 곳이 용경협이다. 겨울에는 빙등제로 유명하단다. 용 모양으로 꾸며진 터널 속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유람선을 탔다. 수질 오염을 막기 위해 배의 연료로 가스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물이 깨끗했다. 양 옆으로 솟아있는 기기묘묘한 봉우리도 볼만했다. 맑은 물과 시원한 바람이 마음을 상쾌하게 해준다.
유람선을 타고 가다 보니 정면의 암벽 중간에 또 ‘용경협, 강택민’이라고 쓴 붉은 글씨가 보인다. 입구의 글씨는 그런대로 보아 줄 만했지만 이번에는 왠지 자연을 더럽히는 오점처럼 느껴졌다. 곁을 지나가면서 보니 전깃줄에 꼬마 전구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조명 시설까지 해 놓았나 보다.
자연은 영원하고 인간은 무한한 줄 모르나 보다. 지금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지만 사후에도 그 권력이 영원할 것인지, 혹은 권력의 무상함을 알고 있어서 이름이나마 후대에 남기고 싶어서 그랬는지.
왕부정 거리 - 북경의 명동
저녁을 먹고 왕부정 거리로 나갔다. 사회주의 국가라서 그런지 북경의 최고 번화가라고 하지만 그렇게 화려해 보이지는 않았다. 생전 처음 보는 전차, 이층 버스, 두 대를 연결해 놓은 버스 등 이채로운 거리의 풍경도 볼 수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어린 아이들이 구걸하는 모습을 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 마음씨 좋게 생긴 외국인이 돈을 주자 여러 명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60년대 서울의 거리 풍경도 저러했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기다리던 장소는 왕부정 거리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왕부정 거리로 들어서니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본 소수 민족을 위한 포장 마차촌이 길가를 따라 죽 늘어서 있었다. 처음에는 냄새가 역했으나 참을 만했다. 포장 마차마다 파는 음식들이 거의 비슷했다. 엄지 손가락만한 메뚜기와 그보다 약간 큰 번데기가 눈에 띄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닭꼬지를 사 먹었는데 조금 짜다고 했다.
여기 저기 헤매다 열 시 조금 넘어서 만두와 맥주를 파는 집으로 들어갔다. 벌써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단다. 여섯 명이서 맥주 한 병씩 시켜서 먹었다. 시원한 맛이 괜찮았다.
왕부정 거리. 순박한 시골 사람이 화려한 도시 사람을 흉내 내 어설프게 화장한 모습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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