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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주마간산 중국 여행기6

취미활동/해외여행

by 빛살 2007. 9. 5.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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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마간산(走馬看山) 중국 여행기 :마지막 날 (2002년 8월 19일 월요일)


노신공원 - 노신과 윤봉길

중국 여행의 마지막 날, 첫 여정인 노신 공원으로 향했다.

 

시(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것의 베개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노신, 김광균 작)

 

언젠가 읽었던 시 구절이 떠오른다. 얼핏 보면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식민지 조선의 모더니스트 시인에게도 하나의 희망이었던 노신. 그 험악한 문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중국 인민들의 존경을 온전히 받았던 인물. 독서를 즐겼던 모택동도 좋아 했으며 최근에 노신 열풍이 불 정도로 중국인에게 사랑받는 문학가이자 사상가이며 혁명가였던 사람. 제도의 개혁보다 인간의 개혁을 더 강조했던 사람. 시신을 덮은 천에 ‘민족혼’이라는 글자를 헌정 받았다는 인물.

우리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아큐정전’이 실려 있고 바로 이 상해 산음로에 있는 노신의 고거(故居-옛집)가 화보로 실려 있다. 본디 이 공원의 이름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널리 알려진 ‘홍구 공원’이었는데 노신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차에서 내려 공원 입구로 가니 ‘노신공원(魯迅公園)’이라고 쓴 표지판이 보인다. 모택동의 영원한 파트너이자 중국 인민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정치 지도자 주은래가 직접 썼다고 한다.

조금 들어가니 매정이라는 건물이 나온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인데 지을 당시 한국 사람들이 직접 찾아오지 않고 지을 건물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내주어 한국식도 아니고 중국식도 아닌 어정쩡한 건물이 되었다고 한다. 조금 밑으로 내려오니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비가 있다.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에 거행된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에서 그 유명한 도시락 폭탄으로 일본 육군 사령관을 폭사시키고, 몰래 빠져나올 수도 있었지만 감격에 겨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윤봉길 의사. 그 의거를 두고 장개석이 중국 백만 대군이 할 수 없는 일을 한국의 한 의사가 하니 장하다고 격찬했다고 한다. 그때 의사의 나이가 24살. 그 나이에 나는 무엇을 했던가 생각하게 했다.

 


  

조금 내려가니 노신의 동상이 나온다. 그 뒤로 무덤이 있고 벽에 ‘노신선생지묘(魯迅先生之墓)’라는 글씨가 보인다. 모택동의 친필이라고 한다. 무덤 앞에 시든 꽃다발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바쁜 일정 때문에 노신기념관에 가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공원은 우리나라 탑골 공원 같았다. 나이 많으신 분들로 붐비고 있었다. 산책하는 사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체조를 하는 사람. 특이한 것은 일행에서 떨어져 길을 헤매고 다닐 때 보았던 춤추는 사람들이었다. 공원 한쪽에서 남녀가 무리를 지어 춤을 추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남녀 사이에 주먹 두 개만 들어갈 수 있는 거리만 유지하면 괜찮다고 주은래가 말한 이후 공식적인 레크레이션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예원 - 부자연스러움

예원은 명나라 때 사천성의 관리였던 반윤단이 부모를 위해 지은 정원이다. 이 곳에 있는 점춘당이라는 건물은 태평천국의 난 당시 이에 호응하여 봉기한 소절회의 사령부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예원의 특징 중에 하나가 담장이다. 담장 위에 커다란 용(龍)머리를 두고 담장을 덮는 기와를 용비늘과 같이 만들어서 담장 자체가 구불구불한 용의 몸통이 되어 머리와 연결되도록 꾸며놓았다. 마치 정원 전체를 용이 감아 돌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용은 천자의 상징으로 민간인은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관가에 불려간 반윤단은 용의 발가락을 핑계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천자를 상징하는 용은 발가락이 5개인데 예원의 것은 발가락이 3개나 4개이므로 용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주장했단다.

이와 같이 동양에서 용의 발가락은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한나라 고조 때는 제왕과 제 1,2 왕자만이 다섯 발가락의 용을 쓸 수 있었고, 제 3,4왕자는 네 개의 발가락을 쓰도록 규정해 놓았다. 후에 이 규정이 바뀌어 중국 황제는 5개, 우리나라는 4개, 일본은 3개의 발가락을 쓰도록 했다.

예원은 이화원이나 졸정원보다 규모가 작았지만 빈틈없이 빽빽하게 장식물로 채워져 있어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우리의 정원은 나지막한 담장너머로 산이 보이고 개천이 보이고 마을이 보이는데, 중국의 정원은 그렇지 않았다. 산도 인공산이고 연못도 인공적으로 만든 연못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또 건물과 건물사이와 연못가에도 길을 내었지만 자연스럽지 않다. 정원을 장식한 태호석(太湖石)도 중국의 어느 정원에서나 볼 수 있지만 구멍 뚫리고 비틀어진데다 회색빛의 거무칙칙한 모습이 멋있기보다는 이상하고 어떤 것은 괴기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높은 담장은 외부 세계와의 소통을 막아 내부의 화려함은 일반 서민의 삶과 완전히 유리되어 있다. 결국 중국의 정원은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채 담장 안에 모든 것을 인공적을 만들어 온갖 화려함을 즐기는 곳 같다. 우리의 정원이 충분한 공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가꾸어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이라면 중국의 정원은 커다란 인공물로 가득 채워져 편안하기 보다는 화려함을 뽐내고 쾌락을 즐기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부석사 안양루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 눈에 아른거린다.


상해 임시정부청사 - 꿈은 이루어진다

임시정부청사는 옛 시가지인 마당로(馬當路)에 있는데 당시에는 프랑스 조계지였다.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 직후까지 임정 청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청사로 들어가는 도로는 2차선인데, 길 양편에는 플라타너스가 우거져있다. 프랑스인들이 와서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플라타너스를 '프랑스 오동나무'라고 부른단다. 우리나라에서는 버즘나무라고 부른다. 집밖으로 내민 막대에 온갖 빨래들이 널려 있었다.  이 곳 풍경은 마치 버짐 난 것처럼 볼품이 없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상해의 빈민가라고 한다.

건물 정면으로 들어가 비디오를 보고 나서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청사는 거기 있었다. 상해 서민들이 사는, 아파트도 아니고 그야말로 닭장 같은 건물이었다. 웬만한 개인 사무실도 이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아무리 망명정부라지만 일국의 정부청사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임정 요원들이 잠자고 먹을 것이 없어서 거지처럼 동가숙 서가식(東家宿西家食)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작은 방들과 좁은 계단 등이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오히려 그러하기에 더욱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너무나 유명한 서정시인이 생각났다. 살아서는 항상 양지에서 온갖 명예와 부를 다 누리고 죽어서는 정부에서 훈장까지 추서한 모국어를 가장 잘 구사했다는 시인. 누가 물으니 ‘일본이 결코 망하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는 말 같지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던 사람. 그의 눈에 여기서 목숨을 걸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운 사람들은 무엇으로 보였을까?

그 시인에게 우리의 독립은 헛된 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절망의 시기에도 꿈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역사는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절실한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나는 여기서 그것을 보았다.


다시 비행기 안

영종도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다.

일주일 간의 여행으로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뿌듯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조금은 더 넓어진 것 같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 가방에는 중국 과자 다섯 봉지와 인형 네 개가 있다. 우리 공주님들을 감동시킬 준비는 완벽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보다 더 큰 감동을 선사해야겠다. 달콤한 과자처럼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살면서 두고두고 꿈에 젖게 하는 그런 것. 그것은 함께 여행하는 것이 아닐까?


후기

가족들이 울릉도로 여행을 가 있어 모처럼 늘어지게 잤다.

늦게 일어나 짐을 정리하면서 디지털 카메라 메모리 스틱을 찾으니 보이지 않는다. 메로리 용량이 128M로 200여장의 사진이 들어있는데. 여권 옆에 소중히 간직했었는데 아마도 영종도에서 여권을 꺼내면서 흘린 것 같다. 남아 있는 거라고는 상해에서 갈아 끼운 16M짜리에 있는 20여 장뿐. 여행을 사진으로 정리하기는 틀렸다. 그래서 이렇게 글로 정리하기로 했다. 생전 처음으로 써 보는 여행기. 우선 아는 게 너무 없었다. 그래서 한 달이 넘게 낑낑거렸지만 성에 차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먹은 것을 해냈다는 약간의 성취감은 있다. 앞으로 성실히 기록하는 습관을 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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