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정원 - 연꽃과 누각
상해를 출발해 소주로 향했다. 인구는 별로 안 되지만 고색창연한 역사의 도시 소주(蘇州,쑤저우). 특히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수도로 수많은 유적과 전설이 남아 있다. 또한 물이 풍부하고 정원 문화가 발달한 아름다운 도시이다.
비를 맞으며 중국의 4대 정원 중 하나라는 졸정원으로 들어갔다. 판소리 ‘흥부가’에서 제비가 물고온 박씨를 흥보 아내가 연밥이라고 말하니 유식한 흥보가 ‘강남 미인들이 초야반경 날 밝을 적에 죄다 따 버렸는데 제까짓 놈이 어찌 연실을 물어 와’하는 구절이 있다. 확실히 강남 땅인 소주에는 연들이 많았다. 졸정원도 넓은 규모에 걸맞게 연못이 많았는데 연못마다 연들이 가득했다. 연꽃도 몇 송이씩 피어 있고 연밥도 달려 있었다. 연밥을 따던 오,월의 미인들이 다 사라졌기 때문인가 보다. 가이드가 주는 연밥을 먹어 보니 풋 익은 개암 맛이 나는 게 먹을 만했다. 해열에 좋다고 한다.
정원의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싶은 ‘졸정’이라는 말은 진나라 반악이 지은 ‘한거부(閑居賦)’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밭에 물을 주어 채소를 팔아 아침 저녁으로 끼니를 마련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 있는 것. 이것 또한 못난 사람이 다스리는 일일 수밖에(灌園蔬以供朝夕之膳…… 孝乎惟孝 友干兄弟 此亦拙者之爲政也)’. 이 구절이 관직에서 추방당한 뒤 고향에 내려와 정원을 짓고 칩거하고 있던 명나라 때 어사 왕헌신의 마음을 울렸나 보다. ‘Humble Administrator's Garden’이라고 영어로 번역하기도 한다.
비도 그친 뒤 드넓은 정원을 거닐었다. 이화원은 너무 드넓어 정원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지만 연못과 건물이 적당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졸정원의 풍경은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닫힌 공간이라는 느낌에 약간의 답답함도 느껴졌다.
졸정원 관람을 한 뒤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니 도로 중앙에 중국식 건물이 세워져 있고 현판에 ‘간장(干將)’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혹시 열국지에서 읽은 간장과 막야의 주인공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맞다고 한다. 그리고 소주시를 가로지르는 도로 이름이 ‘간장로’라고 덧붙여 설명 해준다. 명검의 고향에 내가 온 것이다.
한산사 - 넉넉해지는 마음
버스를 타고 한산사로 갔다.
입구에 풍교라는 다리가 있었다. 풍교 너머 저쪽에 강촌교가 있단다. 옛날 당나라 시절에 장안(지금의 서안)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갔다가 세 번째 고배를 마시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장계(張繼)라는 사람이 배를 타고 풍교와 강촌교(江村橋) 사이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서글픈데 한산사에서는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그네의 심회를 얼마나 어지럽혔을까? 그 때 지은 시가 ‘풍교야박(楓橋夜泊)’이다.
달은 지고 까마귀 우니 서리만 하늘 가득한데(月落烏啼霜滿天)
강교와 풍교의 어선 불빛에 잠 못 이루네(江楓漁火對愁眠)
고소성 저 멀리 한산사에서(姑蘇城外寒山寺)
한밤중 종소리 나그네 뱃전까지 들려오네(夜半鐘聲到客船)
시에 등장하는 종은 일본인들이 약탈해 갔고, 지금 있는 것은 청나라 말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한 번 치면 10년이나 젊어지고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하여 세모(歲暮)에는 이 좁은 곳으로 수만 명이 몰려든다고 한다. 대웅보전 안에 일본이 사과의 뜻으로 최근에 만들어 보내온 종이 걸려 있다. 이 시가 중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한산사를 더욱 유명하게 하고 있다고 한다.
한산사의 원래 이름은 묘보명탑원이었는데 한산이라는 스님이 거처하여 한산사라고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한산(寒山)은 7세기경의 전설적인 인물로 절강성 천태산 국청사 부근에 살았던 은자(隱者)이다. 친구 습득(拾得)과 세속의 온갖 한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다간 사람이다.
작년에 큰 맘 먹고 김달진 역의 한산시를 하루에 한 편씩 정리하겠다며 덤벼들었다가 열 편도 못하고 그만 둔 상태라 한산이 머물렀다는 이 곳을 직접 찾으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입구부터 정문을 가로막고 있는 벽이 답답해 보였다.
대웅전을 보니 한국과 달리 신발을 신고 들어가 사방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열린 구조였다. 신발을 신은 채로 절을 할 수 있도록 무릎 받침이 있는 게 특이했다. 불상은 규모를 자랑하는 민족답게 큼직큼직했다. 곳곳에 한산과 습득의 흔적들이 있었다. 한산시를 접하면서 우리나라의 김시습이나 김삿갓 정도의 시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산사에서는 별도의 법당에 한산과 습득을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모시고 있었다.
다시 한산시를 정독해야겠다.
우스워라, 한산 가는 길(可笑寒山路)
사람의 자취 찾을 수 없네(而無車馬蹤)
굽이굽이 시내는 몇 굽이던가(聯溪難記曲)
겹겹 산봉우리 그 끝을 알 수 없네(疊嶂不知重)
우거진 풀은 잎마다 이슬에 눈물짓고(泣露千般草)
소나무는 가지마다 바람에 읊조린다(吟風一樣松)
내 여기 이르러 길 잃고 헤매나니(此時迷徑處)
그림자에게 어디로 가느냐 물어보네(形問影何從)
사람들이 북적대는 속에서 한산과 습득이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무얼 찾아 그리 헤매느냐고. 한산에 대한 호기심으로 들어갔다가 한산과 함께 절을 나온 것 같이 마음 한 편이 넉넉해 진다.
호구(虎丘 ) - 오월쟁패(吳越爭覇)
호구는 춘추전국시대 말기에 오나라 왕 부차가 그의 아버지 합려의 묘역으로 조성한 곳이다. 그를 매장한 지 3일째 되는 날에 하얀 호랑이가 나타나서 무덤을 지켰다는 전설 때문에 호구(虎丘)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호구 주위로 오자서가 팠다는 작은 운하가 있었다.
오자서(伍子胥), 복수의 화신!
초나라 출신으로 가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모진 고생 끝에 오나라로 와서 조국 초나라를 짓밟고, 죽은 왕의 시체를 파내 매질을 했던 사나이. 서시(西施)를 앞세운 월나라의 미인계와 간신 백비에게 몰려 죽임을 당할 때, 월나라 군사가 들어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도록 두 눈을 뽑아 고소성(지금의 소주) 동문에 매달아 달라고 부탁했던 사나이. 그 때문에 시체가 갈갈이 찢겨져 전당강에 내던져진 사나이. 부차가 구천에게 패해 자결할 때 죽어서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며 얼굴을 헝겊으로 덮어달라고 했단다. 책에서나 읽고 이야기로만 들었던 그의 흔적이 여기 이렇게 눈앞에 펼쳐지다니! 앞으로 살아가면서 뜻밖에 일이 얼마나 일어날지 그 건 모를 일이다.
비록 30여 미터 높이밖에 안 되지만 소주 최고봉이라는 호구로 들어서니 길가에 (試劍石)이 보였다. 넓적한 바위 한 복판이 마치 칼로 벤 듯이 매끈하게 갈라져 있다. 간장과 막야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조금 더 올라가니 제법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합려의 무덤을 만든 뒤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공사에 참여했던 천여 명의 사람을 죽인 곳이라도 하고, 천여 명의 사람이 고승의 설법을 듣던 장소라고도 한다. 그래서 천인석(千人石)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천인석 오른쪽에 손무정이 있다. 손자병법을 쓴 군신(軍神) 손무(孫武)가 오나라 군사를 훈련시키던 곳이라고 한다. 천인석 왼쪽에는 ‘호구 검지(虎丘 劍池)’라는 붉은색 글씨가 있는 석벽이 있는데 사진 찍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당나라 때 명필 안진경의 글씨라고 한다.
그 옆을 지나 둥근 문으로 들어서니 조그만 연못이 있다. 이 곳이 검지로 합려를 장사 지낼 때 명검 3천 자루를 묻은 곳이라고 한다. 후대에 진시황과 삼국 시대 오나라 손권이 검을 찾아보았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검지를 지나 위로 올라가니 조그만 다리가 있는데 가운데 작은 구멍 두 개가 나 있다. 그 곳을 통해 중국 사대 미녀 중 한 명인 서시가 검지를 구경했다고 한다.
정상에 오르니 거대한 탑이 버티고 있다. 호구탑 또는 운안사탑으로도 불리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벽돌탑이다. 전설에 의하면 합려의 장례식이 끝난 후 이마가 하얀 호랑이가 나타났다가 얼마 되지 않아 사라졌다고 한다. 오왕 부차가 신하들에게 무슨 징조인지 물으니 한 신하가 대답하기를 ‘호랑이는 산중의 왕이므로, 천하를 제패한다는 길조이나 얼마 있지 않아 사라졌으니 이것이 걱정된다’고 대답했다. 오왕이 어떻게 할까 물으니 신하는 ‘호구가 원래 호랑이 모습을 하고 있는데 다만 꼬리 모양이 없으니 꼬리 모양의 탑을 만들면 길함이 영원할 것이다.'고 대답하여 탑을 쌓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늘이 정한 운명을 어쩔 수 있었겠는가? 부차도 월왕 구천에게 패하여 자결로 세상을 하직하고 마니.
탑의 규모는 어마어마해서 카메라로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커다란 탑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동방의 피사의 사탑’이라고 불리운다. 탑이 기울어진 이유는 탑의 무게가 6천 톤 정도인데 기초를 너무 얇게 다져서 탑의 무게를 이지지 못해서 기울어졌다고 한다. 부차의 한없는 욕심을 보는 듯해서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호구 유람을 마친 후 쇼핑을 하러 갔다. 소주는 중국 내에서 실크의 고향으로 불릴 정도로 비단이 유명하다고 한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잣는 과정과 이불을 만드는 과정을 구경했다. 그리고 매장에서 실크 제품을 구경하였다. 넥타이에서부터 이불까지 다양한 제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비단 이불을 샀다. 포근한 감촉하며 한없이 가벼운 느낌이 선물용으로 좋을 것 같았지만 참았다.
쇼핑을 마친 후 버스를 타고 항주로 갔다.
항우와 우미인 - 패왕별희(覇王別姬)
항주로 가면서 항우를 생각했다. 소주의 청년 8천명을 이끌고 천하를 호령하다가 유방의 군사에게 쫓겨 사랑하는 우미인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자신도 자결하고만 사나이. 한신의 십면매복지계를 단신으로 뚫으며 60여명의 적장을 상대해 물리친 역사상 가장 힘센 장수로 평가받고 있는 사나이.
하지만 우미인에 대한 사랑은 한없이 지극했던 것 같다. 전쟁터마다 데리고 다니며 한 시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전투에서 800여 명 남은 군사들을 데리고 사생결단을 내려고 할 때 우미인이 같이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으나 젊고 어여쁜 그대를 적병이 죽이기야 하겠느냐며 그 청을 거절하고 결연히 죽음의 길로 떠나고자 했다. 우미인의 마음을 아는 듯 애마 오추가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항우의 굳은 마음을 안 우미인은 이별의 술잔을 항우에게 바치고 선녀무를 춘다. 이에 항우는 자신도 모르게 시를 읊는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건만(力拔山兮氣蓋世)
때가 이롭지 않으니 오추마가 달리지 않는구나(時不利兮騅不逝)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하랴(騅不逝兮可奈何)
우희여, 우희여 어찌하랴 虞兮虞兮奈若何
호랑이 같은 장군이 이런 노래를 부르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마침내 우미인은 자결을 하고 만다. 이 내용이 경극으로 유명한 ‘패왕별희’다.
항우도 강동 8천 명의 젊은이를 볼 면목이 없다며 자살하고 만다. 그동안 항우를 힘자랑만 하는 미련 곰탱이로 알고 있었는데 우미인의 이야기를 생각하니 애처로운 마음 그지없다.
항주(杭州,항저우)는 소주보다 훨씬 크고 북경보다 화려했다. 과거 월나라와 남송의 수도였으며 현재 절강성의 성도이다. 운동장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야간 경기를 하는 듯 응원의 소리가 높았다. 기차역 주위의 호텔에서 묵었다. 역시 밖에 나가지 못하고 방에서 술을 홀짝거렸다.
북규슈여행1_준비 및 첫째날 (0) | 2012.0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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