色 卽 是 空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수·상·행·식도 또한 이와 같다.
사리자(舍利子)는 sariptra의 번역으로 '사리불(舍利佛)'이라고도 한다. 중인도의 구(舊) 마가타국 바라문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리'란 잘 지저귀는 작은 새의 이름이라고도 하며, 해오라기(鷺)의 일종이라고도 한다. 인도의 옛 전설에 어머니가 임신을 하면 태아의 성격이 어머니에게 옮겨진다는 말이 있다. 사리자를 잉태한 어머니는 이전과 달리 총명하고 웅변적으로 변했다. 그래서 사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는 성장해서 그 당시 유명한 어떤 회의파(懷疑派) 철학자의 제자가 된다. 타고난 총명과 웅변으로 동지 백여 명의 지도자로서 이름을 널리 떨쳤다.
어느 날 노상(路上)에서 만난 앗사지라는 사람의 예의 바른 태도에 감복(感服)하게 된다. 앗사지는 석존이 싯달다 왕자로 있을 때 다섯 사람의 친구 중의 한 사람으로 6년간 고행을 함께 했다. 그러나 석존이 '고행이 무의미하다'고 깨닫고 결연히 고행하던 장소에서 벗어나 니연선하(尼蓮仙河)에 목욕한 후 슈자타라는 젊은 여성의 권유에 따라 우유죽으로 피로를 치유하게 된다. 이것을 본 앗사지는 '싯달다는 타락했다'하고 경멸하며 그로부터 떠나 버린다. 그래서 멀리 선인(仙人)의 서지(棲地)라고 전하는 녹야원(鹿野苑)이란 삼림 속에 가서 4인의 벗과 함께 고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석존은 남으로부터의 비난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고, 자기가 믿는 도에만 정진하였다. 고행을 버리고 신체를 청결히 하여 피로가 회복되자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좌선을 계속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깨달음을 얻은 석존은 이 즐거움을 벗에게 전함과 동시에 가르침도 겸수(兼授)하고자 아야교진여등 5인의 친구가 있는 녹야원으로 향하였다. 부다가야로부터 녹야원까지는 약 200키로미터쯤 되는데 7일간을 걸어서 도착하였다. 그런데 5인의 벗은 석존과는 결코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서로 굳게 약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석존의 따뜻한 눈길과 그 성품에 완전히 융화되어 마침내 석존의 제자가 된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앗사지이다.
앗사지와 만난 사리자는 마음 속으로 그 행의(行儀)가 훌륭함에 놀라는 한편, 이 같은 사람의 스승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게 여겨 그에게 스승이 누구인지를 묻고, 스승이 무엇을 가르치는가를 물었다. 앗사지는 석존이 스승이라 밝히고, '모든 것이 연(緣)을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다. 연을 좇아 생(生)하고 연을 따라 멸(滅)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사리자는 이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와 같은 '인연설'은 다른 학파에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한 일이며, 그도 원래부터 알지 못했던 처음 듣는 가르침이었다. 그때까지 품고 있던 의문점이 모두 풀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동창인 목련(目連) 등과 함께 석존의 제자가 된다. 뒤에 이 두 사람은 석존의 10대 제자가 되는데 사리자는 지혜 제일(智慧第一), 목련은 신통 제일(神通第一)이라고 일컫게 된다. 또한 석존은 사리자를 깊이 신용하여 라훌라(석존의 아들, 석존의 제자가 됨)를 지도케 한다. 그러나 당시는 그의 수행도 얕고 그전의 회의파 철학적인 사고방식의 영향이 남아 있었으므로 지혜보다는 논리적인 지식의 면이 왕성했다. 이러한 조건하의 사리자가 반야의 지혜의 상징인 관자재보살로부터 공에 대한 말을 듣는 것이 반야심경이다.
우리의 육체를 포함하여 모든 물질적 현상을 색(色)이라고 한다면 空(sunya - '텅 비었다'는 뜻)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현상은 인연에 의해 모였다가 인연 따라 흩어지므로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공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용수(龍樹, Nagarjuna, 2-3세기경)이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든 실체적 원리를 상정하는 여러 학파들을 비판했다. 그는 만약 본질이나 개념을 실체화한다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현실의 경험세계는 나타나고 흩어지는 변화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으며, 서로서로 대립, 의존하는 관계로 성립되어 있다. 그래서 공이며 무자성(無自性)이다.
깨끗함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더러움은 없다. 깨끗함에 의존하여 더러움이 있다. 그러므로 더러움은 없다.
더러움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깨끗함은 없다. 더러움에 의존하여 깨끗함이 있다. 그러므로 깨끗함은 없다.
- 中論4권, 第23 觀顚倒品-
하나의 현상은 거기에 대립하는 현상을 전제로 하며, 그 대립하는 현상을 부정함으로써 하나의 현상은 성립한다. 따라서 현상 그 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은 어떠한 개념으로도 표현할 수 없으며, 다만 부정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용수는 주장한다. 말로써 표현하고 규정짓기를 거부하면서 억지로 공이라고 한 것은, 결국 그가 인간의 언어를 불신하였기 때문이다. 최고의 진리에 관하여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언어 습관상의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최고의 진리에 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은 언어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도 된다. 용수의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그릇됨을 깨뜨려(파사破邪) 바름을 드러냄(현정顯正)에 있었다. 그러나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현정을 언어로 표현할 경우에는 언어의 허구성 때문에 또다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로 그는 파사(破邪)에만 치중할 뿐 현정(顯正)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파사를 거듭하다가 보면 최고의 진리는 자연히 드러나게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래서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은 파사가 곧 현정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현상의 본성을 공이라고 관찰하는 것을 진제(眞諦)라 하고, 모든 현상에 대한 중생들의 견해를 속제(俗諦)라고 한다. 그리고 이 둘을 이제(二諦)라고 한다.
속제에 의하지 않고서는 진제를 얻을 수 없다. 진제를 얻지 않고서는 열반을 얻을 수 없다.
- 中論4권, 第24 觀四諦品-
그러므로 속제는 진제의 수단이기는 하지만 진제도 또한 열반의 수단이다. 따라서 이제(二諦)는 열반의 수단으로서의 구별이고, 열반은 이제(二諦) 밖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언어에 의한 표현은 열반 체험 그 자체는 아니며, 열반의 체험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수는 부정에 부정을 거듭해 나아가는 것이다.
공은 곧 연기이다.
여러 인연으로 일어나는 것을 나는 공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또 가명(假名)이며 중도(中道)이다. 일찍이 한 가지도 인연을 쫓아
일어나 지 않 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 아닌 것이 없다.
- 中論4권, 第24 觀四諦品-
이 공은 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여러 개념 가운데 어느 하나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중도(中道)라고도 한다. 중론(中論)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용수의 학파를 중관파(中觀派)라고 한다. 용수에 의하면 열반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공이다.
열반과 윤회는 아무런 구별이 없다.
- 中論4권, 第25 觀涅槃品-
열반이라는 특별한 경지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생의 미망(迷妄)이다. 번뇌와 열반이 있다고 생각할 때 번뇌가 있고, 번뇌도 없고 열반도 없다고 관찰할 때 열반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불신론(佛身論)이 설해지고 있지만 용수는 그것에 의해서는 여래를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희론(戱論: 분별을 언어로 나타냄)을 초월한 여래를 희론하는 사람은 희론에 의해 혜안(慧眼)이 깨뜨려져 모두 여래를 보지 못한다.
-中論4권, 第22 觀如來品-
여래의 본성은 곧 세간(世間)의 본성이다.
- 中論4권, 第22 觀如來品-
모든 현상이 무자성·공이므로 여래도 또한 공이다. 그러므로 연기를 보는 것이 법을 보는 것이며, 그것이 그대로 여래를 보는 것이라고 용수는 주장한다.
반야심경08-고정 불변의 실체는 없다 (0) | 2009.06.20 |
---|---|
반야심경07-모든것은언제나그대로다 (0) | 2009.06.17 |
반야심경05-공의 인식 (0) | 2007.09.05 |
반야심경04-경제 (0) | 2007.09.05 |
반야심경03-반야심경의 이해 (0) | 2007.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