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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마음닦기/독서

by 빛살 2014. 1. 1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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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사마천 지음/김진연 편역/서해문집

 1권(2004) 2·3권(1993)

 

1990년대 중반쯤 책을 구입해 발췌독을 하다가 1권을 잃어버렸다. 2000년대 중반쯤 알라딘 중고서적센터를 통해 1권을 다시 구입했다. 그리고 2014년 드디어 완독을 했다. 20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이 모두 휴넷 인문학당 문사철100의 도움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책을 다시 펼치면 생소한 이름이 다시 튀어나온다. 나의 아둔함 탓도 있지만 너무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을 원망해도 될 것 같다. 사기는 인물들의 백과사전이라고도 할 만하다. 그 인물들을 바라보는 지은이의 눈길이 가장 먼저 내 마음에 와 닿았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초상화

 

중국 사마천학회 회원인 김영수 교수는 사마천의 초상화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초상화라고 말한다. 남성을 상징하는 수염이 없기 때문이다. 김시습도 머리 깎고 중이 되었지만 수염만은 깎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수염은 남성성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사마천은 이릉이라는 장수를 변호하다가 한무제의 미움을 사 요참형(腰斬刑-허리를 잘리는 형벌)을 선고 받는다. 이 형벌에서 벗어나려면 50만 전의 벌금을 내고 평민으로 살아 가든가, 궁형(宮刑-생식기를 잘리는 형)을 받고 환관(내시)으로 살아가는 길이 있었다.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러한 치욕을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마천은 선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보다 더 치욕적이라는 궁형을 자청하게 된다. 후에 사마천은 환관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위까지 오르지만 수염 없는 사마천의 초상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치욕 속에서도 살아 남은 이유

 

태사령이었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자신이 쓰던 역사서를 완성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유언을 지키려면 목숨을 보전해야 한다. 역사서를 쓰기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치욕을 선택한 것이다. 목표를 위해서는 어떠한 치욕도 견뎌내는 모진 힘. 이것이 <사기>를 꿰뚫고 있다. 나에게 <사기>는 복수혈전의 교과서로 읽힌다. 부차의 똥까지 맛보며 20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복수를 완성하는 합려, 복수의 화신 오자서, 손빈, 유방, 한신 등 욕됨을 참고 뜻을 이루어 내는 인간들이 무수히 나온다. 나쁘게 말하면 '뒷끝 작렬'의 인간들이다. 중국의 이런 모습이 무섭다.

반면 우리 민족성은 항우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화끈하고 뒷끝 없고..

 

 

죽음을 뛰어넘어서

 

사마천은 벗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報任安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이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만 그 죽음이 태산보다 큰가, 아니면 터럭만도 못한가는 그 동기의 차이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人固有一死 或重于泰山 或輕于鴻毛 用之所趨異也)

 

환관으로 살아가면서 하루에도 아홉 번 창자가 뒤집히고,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식은땀으로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던 사마천,

죽음보다 더 큰 목표가 있었기에 치욕을 견딜 수 있었고 동양 최고의 역사서 <사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사마천에 미치지 못한다.(司馬遼太郞 - 시바 료타로)

 

시바 료타로는 필명이며 본명은 후쿠다 데이치(福田定一)이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라는 이름에는 자신이 중국의 사마천을 따라가려면 까마득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의 국민작가로 추앙받고 있다.

 

문사철006) 사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사례 중에서 인상 깊었던 한 가지를 골라 그것을 설명하고, 우리의 조직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느끼는 시사점을 도출해 보세요.

 

인상여가 새롭게 느껴진다.

강대국 진나라에 천하의 보물 화씨의 구슬(和氏之璧)을 가지고 가서 죽음을 무릅쓰고 온전하게 조나라로 되가지고 온(完璧趙歸) , 면지 지방에서 조나라 왕과 진나라 왕이 만났을 때 지혜와 용기로 조나라의 권위를 잃지 않게 한 사례는 강력한 상대방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사마천의 말을 빌려 본다.

"죽음을 각오하면 반드시 용기가 생긴다. 죽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에 처하여 어떻게 임하는가 하는 것이 진정 어렵다. 인상여가 구슬을 되돌려 받고 기둥을 노려보았을 때 그리고 진나라 왕의 신하들을 꾸짖을 때는 자신이 죽을 각오로 임했던 것이다. 선비 중에는 비겁하여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확한 판단력과 죽음을 무릅쓴 용기, 그리고 임기응변의 지혜를 갖추어야 위기에 빠진 조직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상여는 보여주고 있다.

 

자신에게 모욕을 주겠다며 벼르고 있는 염파를 만나면 인상여는 일부러 피했다. 지금도 염파가 오는 것을 보고 인상여가 재빨리 마차를 몰아 피했다는 자리(回車巷)가 남아 있다고 한다. 둘이서 싸우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알게 된 염파는 웃통을 벗고 가시 회초리를 짊어진 채 인상여의 집을 찾아가서 사죄하였다(負荊請罪). 이후 두 사람은 목이 떨어져도 변치 않을 문경교우(刎頸交友)가 되었다.

다시 사마천의 말을 빌린다.

"인상여는 한 번 용기를 내어 위엄을 천하에 떨치고 물러나서는 염파에게 양보하니 그의 명성은 하늘보다 더 높고 태산보다 더 무거웠다. 실로 지혜와 용기를 함께 지녔던 인물이라 말할 수 있다."

대의를 위해 자신을 낮출 수 있었던(先公後私) 인상여의 모습에서 조직의 미래를 걱정하는 리더의 모습을 본다.

 

인상여(藺相如)를 사모하여 그의 이름을 그대로 쓴 사람도 있다. 탁문군과의 야반도주로 유명하며 부(賦)를 잘 써 한무제의 사랑을 받았던 사마상여(司馬相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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