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는 한국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김춘수의 '존재와 언어'라는 측면에서,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와 같은 시에서 릴케의 그림자을 찾아 볼 수 있다.
<말테의 수기>는 릴케의 유일한 장편소설로 1904년 2월에 쓰기 시작해서 1910년 5월에 출간했다. 장편 치고는 별로 길지 않는 소설인데 6년 이상이 걸린 것이다. 이런 작품을 단숨에 읽어내기는 여간한 문학적 감수성을 지니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 같다. 찬찬히 자신의 내면을 살펴가면서 고심 끝에 문자화한 것이라 줄거리 위주로 읽다가는 나처럼 읽고 난 뒤에 뭔가 허망한 느낌만 들지도 모른다. 시간을 두고 정성들여 곱씹어야 제 맛을 알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화자의 자아 성찰이 중심되어 각각 독립적인 삽화들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전체 줄거리를 요약하기도 힘이 든다. 하지만 지은이의 세계에 대한 풍부한 감수성과 그것을 표현하는 뛰어난 능력이 다시 한번 책을 잡고 싶게 한다.
전체 내용은 전반부 파리 체험, 중반부 유, 청년기 회상, 후반부 독서 체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 첫머리부터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대도시의 병원은 죽음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곳이다. 결국 사람들의 삶은 병으로 끝난다. 이는 죽음에서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자 존재의 최종적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릴케의 생각이 말라붙은 나의 의식에 균열을 일으켰다.
"내 몸에는 과일의 씨앗처럼 죽음의 씨앗이 있다. 나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몸 안에 죽음의 씨앗을 품고 있다." 라는 말이 강한 인상을 주었다.
중반부에 나오는 니콜라이 쿠스미취의 이야기도 얼핏 읽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시간, 과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간, 실존의 시간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끝머리에 나오는 '돌아온 탕아'에 대한 재해석도 만만하지가 않다. 우리의 고정관념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사랑을 거부하고 대상을 넘어서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 봐야겠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모든 현상에서 인간 존재가 소외된다는 것에 있다.
대도시의 병원에서 일어나는 죽음은 인간은 없고 병만이 남는다. 죽은 사람의 삶보다 어떤 병으로 죽었는지가 더 관심을 받고, 그 병이 그 사람의 일생을 대신한다. 삶과 세계의 근본 의미를 잃어버리고 현상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죽음의 사회적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고 삶과 세계에 대한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현대의 개별화, 파편화 된 삶을 사회적으로 다시 한번 고찰해 봐야한다.
니콜라이 쿠스미취는 세계에 대한 몰이해로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개인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시간을 물질과 과학으로만 이해할 때 생기는 불안과 그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시 외우기를 제시하고 있다. 합리성이라는 미명하에 삶을 물질화시키는 현대 문명을 비판하고 그 해결책으로 예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끝에 나오는 '돌아온 탕아'의 재해석은 상대를 소유하거나 제한하려고 하는 인습적 사랑을 거부하고 사랑의 대상보다는 사랑하는 마음 자체에 중점을 두는 대상을 초월하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현대사회의 문제는 모든 현상에서 자아가 소외된다는 것에 있다. 그 해결책은 성찰을 통해 자아를 발전시켜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