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보의 일생
두보(杜甫, 712~770)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少陵)이며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당 현종 선천 원년(712)에 하남성 공현(지금의 허난성河南省 鞏義市)에서 태어났으며, 조상들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는 진(晉)나라의 두예(杜預)와 초당 시대의 두심언(杜審言)이 있다.
24세에 낙양에서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중국의 동북쪽인 제주와 조주를 유람하였으며 36세 때 다시 장안에서 과거를 보았으나 재상인 이임보의 농간으로 급제하지 못했다. 40세에 자신의 재능을 알리기 위해 당시의 황제였던 현종에게 ‘三大禮賦’를 지어 바쳤으나 관직을 얻지 못하고 44세에 우위솔부주조참군(右衛率府冑曹參軍)이라는 낮은 관직을 맡게 된다.
그 해에 안록산의 난(755년)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하여 새로 즉위한 황제인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로 가니 숙종이 기특하게 여겨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그는 조정에서 재직하였으나 1년 만에 반군 토벌에 실패한 방관(房琯)을 변호하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화주사공참군(華州司功參軍)으로 좌천되었다. 47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서북쪽 변방인 진주(秦州)와 동곡(同谷)을 거쳐 사천성의 성도(成都)에 정착하여 완화계(浣花溪)에 두보초당을 세우고서 한가로운 생활을 하였다. 이 무렵에 성도의 절도사였던 엄무(嚴武)의 막료로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는데,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성도를 떠나 장강을 따라 가다가 기주(夔州)의 협곡에서 2년 동안 거주하는데 여기서 상당한 양의 시를 짓게 된다. 2년 후에 다시 협곡에서 나와, 호남성과 호북성의 장강을 배를 타고 떠돌아다니며 방랑을 계속하다가 배 안에서 병을 얻어 59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두보는 성당(盛唐)의 시기를 거쳐 당의 국력이 쇠퇴하는 시기를 살았다, 그의 시에는 불안한 사회와 어두운 정치 현실, 그리고 백성의 고통을 노래한 것이 많아서 그의 시는 한편으로 ‘시사(詩史)’로도 불린다. 오늘날 전해지는 두보 시는 대략 1,470여 수이며, <두공부집>이 전한다.
2. 두보의 시
두보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실성이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성실해야만 한다는 중국문학정신은, 두보의 시 속에서도 아주 활발히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성실이 만들어 낸 우수를 근간으로 일상생활에서 많은 제재를 취해, 인간의 생활상과 심리, 자연풍경 속에서 그 때까지 다른 시인이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널리 발굴하여 자유자재로 읊었으며, 표현에 정성을 기울였다. ‘경(京)에서 봉선현(奉先縣)으로 부임할 때의 영회(詠懷), 오백자’ ‘북정(北征)’의 2대 걸작을 포함한 장편 고체(古體)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해 시로 지은 역사라는 의미에서 <시사(詩史)>라 일컬어지며, 단시(短詩)가 정형(定型)인 금체(今體)에서는 특히 율시를 잘 지었으며, 엄격한 형식 속에서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읊어 이 시형의 완성자로 평가된다. 육조(六朝), 당 초기의 시가 정신을 상실한 장식으로 떨어지고,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데 비해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되찾으면서도 그것을 성숙한 기교로 표현해 중국 시사 상 한 획을 그었다.
두보는 후대의 영향을 주었는데 그의 시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9세기 당나라 사람 원진(元稹)으로, 그는 두보를 위해 묘지명을 썼다. 백거이(白居易)도 두보의 숭배자로, 그의 사회비판적 시는 두보에게 배운 것이다. 두보에 대한 평가가 시단에서 확정된 것은 11세기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 등의 칭송에 의해서이다. 시성(詩聖)이란 말도 이즈음 생긴 듯하며, 그 뒤 계속해서 중국시의 전형으로 평가되었다. 중국에서 문화혁명 이후 직접적인 조술(祖述)은 사라졌으나, 중국 최고 시인으로서의 위치는 문화대혁명 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중국에서도 확고하다.
두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윤주(潤州)의 자사 번황(樊晃)이 〈두공부소집 杜工部小集〉 6권을 편집하여 그 서(序)에서 "문집 60권이 양쯔 강과 한수이 강[漢水] 부근 지방에서 읽히고 있다"고 서술한 것으로 보아, 두보 시의 원고는 사후 곧 누군가가 베껴 써서 일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었던 것 같다. 〈구당서 舊唐書〉 문원전(文苑傳)에도 '두보의 문집 60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舊唐書)>에서 말하는 집(集) 60권은 전해지지 않고, 후세에 두집(杜集)의 원전이 된 것은 11세기 북송의 왕수(王洙)가 편집한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으로 그것의 남송간행본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두보 시의 주석은 예로부터 아주 많은데, 청대(淸代)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 杜詩箋注〉,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 杜詩詳注〉, 포기룡(浦起龍)의 〈독두심해 讀杜心解〉, 두양륜(杜楊倫)의 〈두시경전 杜詩鏡銓〉 등이 중요한 것으로 손꼽히며, 그중에서도 구조오의 주(注)는 두보 시 주석의 집대성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성종 12년(1481) 유윤겸(柳允謙) 등이 원(元)나라 때 편찬된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원본으로 삼아 우리말로 번역하여 〈두시언해 杜詩諺解〉를 편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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