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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삶과 문학

한문/중국한시

by 빛살 2014. 6. 23.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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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생

소식(1036-1101)은 자가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소식은 젊었을 때 부친을 따라 아우와 함께 수도인 변경(지금의 카이펑開封)에 갔다가 구양수와 매요신 등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고 일약 명성을 날렸다. 소식과 소철형제는 진사에 급제하여 곧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인종은 소씨 형제가 지은 문장을 보고 후손에게 도움이 될 재상감을 얻었다고 좋아했다.

소식의 관직생활 초기는 순탄했지만, 왕안석의 변법을 반대하면서 복잡한 당파싸움에 휘말려 오랫동안 배척을 받았다. 그는 정치생활 40년 중 30여 년간을 지방 관리로 지냈으며, 백성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여 수리 사업을 벌이고 농업 기술을 개량하여 가는 곳마다 빛나는 업적을 쌓았다. 특히 문학적 성공으로 인해 명성이 점차 널리 퍼졌으며, 마침내 북송의 유명한 정치인, 문학가, 시인, 화가 그리고 서예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2. 정치생활의 부침

소식이 성장한 시기는 북송 왕조에 안팎으로 위기가 조성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사회의 인정과 풍속 그리고 북송 왕조의 정치적 조치를 연구하면서 범중엄과 구양수 등의 업적을 계승하리라 마음먹었다.

신종 희령 2(1069), 조정과 재야에 큰 충격을 던진 엄청난 개혁이 시작되었으니 바로 유명한 왕안석 변법이다. 소식은 그와 같은 정세에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인종 말년에 개혁을 제안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인재의 등용을 강조한 것일 뿐 법의 개정에는 부정적이었으며, 특히 급진적인 조치는 더더욱 반대했다. 그리하여 그는 사마광, 구양수 등과 함께 변법에 반대하는 대열에 서게 되었다.

희령 4, 소식은 변법을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항저우杭州의 통판通判으로 강등되었다. 임기가 끝난 후에는 또 밀주(지금의 산둥성 주청현諸城縣), 쉬저우徐州, 후저우湖州 등의 지주知州로 부임해서 평생 불우한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당시 소식은 수도를 멀리 떠나 있었지만, 중앙의 정치적 적수들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원풍 2, 소식의 나이 43세에 문학사에서 유명한 오대시안烏臺詩案이 일어났다.

그 해 6월 한 어사가 소식이 올린 글 중에서 네 구절을 찾아내 조정을 비난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후 또 어떤 사람들은 소식의 풍자시를 몇 수 들춰내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명을 씌워 후저우의 태수로 있던 그를 체포하여 수도의 어사대御史臺(오대烏臺) 감옥에다 근 3개월 동안 감금했다. 그들은 소식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소식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생각하고 친족들에게 보내는 이별시 두 수를 써서 옥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이 시는 신종의 손에 들어가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아울러 태후와 대신들에게도 적극적인 탄원이 들어가자 소식은 마침내 감옥에서 풀려나 다시 황저우黃州의 단련부사라는 말단 관직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적벽부>를 비롯한 많은 대표작이 이 시기에 지어졌고, 친구의 주선으로 옛날의 군사 주둔지였던 황무지를 얻어서 이를 개간해 동파(東坡)라 이름 짓고 스스로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부른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원풍 8년에 신종이 죽고 태황태후 고씨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사마광을 대표로 하는 변법의 반대파가 등용되었다. 소식은 이때 수도로 불려가면서 관직이 높아졌다. 하지만 반대파 내부에 분파가 있는데 회의를 느꼈고, 변법을 모두 폐지하는 데는 반대했기 때문에 다시 배척을 받아 항저우의 지주로 가게 되었다.

1085년에 즉위한 철종은 할머니인 태황태후와 구당파가 정권을 잡은 것에 반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친정親政을 하면서부터 구당파를 공격했다. 그 여파로 또다시 재앙을 만난 소식은 광둥의 후이저우蕙州로 밀려났다가 나중에는 멀리 하이난海南의 충저우儋州까지 가게 되었다.

소식의 일생을 보면, 시에서는 명성이 나날이 높아갔지만 관직생활은 점차 추락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좌절을 겪으면서도 그는 시종일관 태연하고 낙관적이며 활달한 정신으로 창작에 임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명편과 대작을 남김으로써 후세에 칭송을 받았다.

 

3.문학적 성취

소식의 시, , 산문에는 웅대한 기상이 드러나 있다. 북송 문학을 대표하는 풍부한 내용과 독특한 기풍은 구양수 등이 이끈 시문 혁신운동의 진일보한 결과이다.

소식은 평생 2700여 수의 시를 지었다. 그의 시는 청신하고 자연스러운 데다 장엄한 면과 해학적인 면, 고졸하면서도 탁월한 솜씨가 한데 어울려 송시宋詩가 성숙한 단계로 나아간 증거가 되었다. 그는 역사와 현실, 천상과 인간세상, 만물과 인간을 교묘하게 결합시킴으로써 놀랄 만한 예술적 효과를 창조했으며, 철학적 이치를 시에 담음으로써 무슨 일이든 시로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송시의 발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예컨대 가로로 보면 고갯마루 옆으로 보면 봉우리, 멀리서 가까이서 높은 데서 낮은 데서 보는 곳에 따라 각기 다르다네. 루산廬山의 진면목을 알아채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그 산속에 이 몸이 있기 때문이네”(<제서림벽題西林壁>)이라는 너무도 유명한 시를 남겼다.

소식의 사는 송사宋詞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의 사는 지금까지 340여 수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사에서 경물의 서정을 묘사할 뿐 아니라 감회와 추억 등을 표현하고 이치를 설명하고 선을 이야기했다. 나아가 당나라 말기와 오대 이래로 남녀 간의 사랑이나 이별의 슬픔만을 노래해오던 기존의 틀을 깨뜨리고 사의 소재를 확대하여 그 수준을 높이면서 시문의 혁신운동을 사의 영역으로까지 넓혔다. 소식의 사는 당나라 말기와 오대의 완곡하고 함축적인 기풍을 벗어나 호방사파를 형성하면서 후세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남송의 애국사인(愛國詞人) 신기질(辛棄疾)은 그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소식의 시사에 담긴 낭만주의와 호방한 기풍은 후세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현대의 학자 첸중수錢鍾書<송시선주宋詩選注>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대에 이백 이후로는 소식의 호방함을 따를 자가 없었다.”

소식은 평생을 구양수가 주도한 고문의 혁신운동에 주력했으며, 육조 이래로 화려함만 추구하는 문풍을 청산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자연스럽고 실용적인 문장을 강조했고, 글의 내용이 실제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소박하고 가식이 없는문풍을 견지했다. 동시에 수많은 모범적인 문장으로 자신의 주장을 실천함으로써 구양수를 이은 송나라 고문운동의 리더가 되어 확고한 입지를 구축했다.

소식이 평생 써낸 정론政論, 상서上書, 사론史論 가운데에서는 25편의 <진책進策>, <사치론思治論>, <상신제황제서上神宗皇帝書>와 훗날 <지림志林>에 수록된 일부 사론이 가장 유명하다. 이 문장들은 이치가 분명하고 기세가 웅혼할 뿐 아니라 도도하고 소탈해서 종횡으로 거침이 없으며 설득력이 강하다. 북송 중기 이래로 소식의 문장은 과거 응시자들에게 모범이 되어 널리 애송되었으며, 심지어 다음과 같은 민간에 떠돌 정도였다.

소식의 문장에 익숙하면 양고기를 먹을 수 있고, 소식의 문장에 생소하면 나물국밖에 못 먹는다.”

훗날 명청대의 문인들도 송나라 산문의 특색을 이어받았는데, 소식의 문장이야말로 그들의 전범이 되었다.

 

4. 항저우와의 인연

아름답고 번화한 강남의 도시 항저우는 소식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희령 4(1071) 7, 소식은 수도에서 밀려나 항저우의 통판으로 3년간 재임하게 되었다.

항저우에 도착한 소식은 산 좋고 물 맑은 이 고장이 대뜸 마음에 들었다. 소식은 항저우의 아름다운 산수를 구경하는 동안 여러 명사 및 고승들과 교류하면서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남겼다.

원우 4(1089), 소식은 항저우의 지주로 부임했다. 항저우 백성들은 길 양 옆에다 향안香案(향로를 받치는 상)을 놓고 그를 환영했다. 소식은 항저우에서 시후를 준설하고 남북을 관통하는 2.8 킬로미터 길이의 제방을 쌓았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소공제蘇公堤라고 부른다. 제방에는 모두 여섯 개의 아치형 다리가 있고, 제방 양 옆에는 갖가지 화초와 나무가 심어져 있다. 봄이 오면 붉은 복사꽃과 푸른 버들이 어우러져 경치가 더욱 아름답다. 특히 아침 안개가 자욱할 때 호수가 깨어나면서 버들은 연기와 같고, 봄바람 불고 새들이 합창하는 광경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에 소제춘효蘇堤春曉란 이름을 붙여서 시후호십경西湖十景 중 으뜸으로 친다.

 

5. 적벽삼창

신종 원풍 2(1079), 소식은 오대시안으로 모함을 당해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후 황저우(黃州)의 단련부사로 강등되었다. 사실 말이 부임이지 귀양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생활의 어려움은 물론 행동에도 제약이 따랐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황저우는 양쯔강 중류에 위치한 험난한 요충지로서 우한삼진武漢三鎭이 바로 그 서쪽에 있었다.이런 지리적 위치 때문에 예부터 많은 영웅이 나타나서 격렬한 다툼을 벌였던 곳이다. 이 웅장한 강산과 역사적 인물에 고무된 소식은 심금을 울리는 산문과 사를 많이 지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적벽을 유람한 후에 지은 한 편의 사와 두 편의 부이다.

황저우의 적벽은 삼국시대 동오의 명장 주유가 조조를 대파했던 곳이다. 적벽을 유람하면서 감회에 젖은 소식은 유명한 사 <적벽회고赤壁懷古>를 남겼다. 이 작품은 적벽이 기이한 경관과 주유, 제갈량 등 영웅들을 묘사했다. 심각한 고민을 안고 인생은 꿈과 같다고 말하지만, 기본적인 내용은 장대한 강산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칭송이다. 기백이 웅장한 이 작품은 소식의 대표적인 사이자 북송 3대파의 하나인 호방파의 대표작이다.

<전적벽부前赤壁賦><후적벽부後赤壁賦>는 각각 신종 원풍 5(1082) 가을과 겨울에 지은 것이다. 적벽의 곳곳을 돌아본 뒤 활달함에서 고민으로 접어드는 과정과 다시 고민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담고 있으며, 역경에 처해서도 삶을 사랑하는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를 표현했다. 이 두 편의 글은 풍부한 변화 속에 평이함과 자연스러움을 담아 문부文賦의 전범으로 꼽힌다.

 

6. 문단의 삼소

소순과 소식, 소철 삼부자는 유명한 문학가로서 당송팔대가의 반열에 들었다. 이런 일은 문학사에서도 극히 드문 일이다.

소순(1009-1066)은 자가 명윤明允이고 호는 노천老泉으로 쓰촨성 메이산眉山 사람이다. 기록에 의하면, 27세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하는 바람에 예전에 지은 글을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다시 새롭게 시작했으며, 소식과 소철 두 아들의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056, 47세의 소순은 두 아들을 수도에 보내 과거에 응시하게 하는 한편, 자신도 2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가지고 문단의 대표인 구양수를 찾아갔다. 구양수는 그를 높이 평가하며 즉시 조정에 천거했다. 더욱이 소식, 소철 형제가 동시에 진사에 급제하자 세 사람의 이름이 일시에 수도를 뒤흔들었고 미담으로 널리 전해졌다. 그리하여 나중에 수도로 오는 학자들도 그들을 현명한 이로 존중하고 그들의 글을 배우는 것을 법도로 삼겠다고 할 정도였다.

소순은 후에 비서성秘書省 교서랑校書郞, 패주覇州 문안현文安縣 주부主簿 등을 지내다가 57세에 세상을 떠났다. 소순의 문학적 성취는 줄 산문 분야에서 두드러졌으며, 특히 책론策論에 능했다. 그의 글은 활달한 데다 언어가 간결하고 힘이 넘쳤다. 이러한 기풍은 소식을 포함해 후세의 산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육국론六國論>은 후세에 널리 전해진 명편이다.

소철(1039-1112)은 자가 자유子由이고 호는 영빈潁濱이다. 그는 부친과 형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고 웅대한 포부를 세웠다. 19세에 형과 함께 진사에 급제했으나 왕안석과 정치적 견해가 달라 줄곧 배척을 받았다. 철종 때 조정에 불려갔지만 7년 동안 관직이 여덟 번이나 바뀌는 등 부침이 심했다. 그러다 작은 현의 부재상 직무를 맡아 마침내 정치적 포부를 펼칠 기회를 잡았다.

많은 저술을 남긴 그는 문학 성취는 비록 아버지나 형에 못 미치지만 독자적으로 하나의 유파를 형성했다. 소식은 아우의 문장이 광대하고 담박한 데다 일창삼탄一唱三嘆(한 번 읽고 세 번 감탄(感歎)하는 뜻으로, 시문(詩文)의 훌륭함을 칭찬(稱讚)하는 말)의 소리가 있다며 그의 시가 자기를 훨씬 능가한다고 칭찬했다. 청대의 문인들은 그러한 소철의 문장을 모범으로 삼았다.

소순, 소식, 소철 삼부자는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들은 출발점은 같았지만 각자 자기만의 색깔을 지녀 사람들에게 응집되어 있는 노천, 호방한 동파, 우아한 영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세 사삼은 북송의 고문 혁신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아울러 평생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생활에 관심을 기울이고 훌륭한 업적을 남김으로써 후세에 길이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참고문헌]

<중국문명대시야>, 베이징대학교 중국전통문화연구중심, 김영사, 2007

<출처> 휴넷 인문학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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