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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보살

불교/보살

by 빛살 2015. 12. 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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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보살(彌勒菩薩)

 

범어 Maitreya의 음역이다. Maitreya자비에서 생긴 것이라는 의미로 한문으로는 자씨(慈氏)’ ‘자존(慈尊)’이라고 번역된다.

미륵보살은 석가의 보처보살(補處菩薩) 또는 당래불(當來佛)이라고도 불리는데 현재불인 석가에 이어 다음 대에 불()이 되는 것이 정해져 있는 보살이라는 말이다. 원래 석가의 제자였으나 현재는 부처가 되려고 도솔천에서 수행 중에 있는 보살이다. 석가 입멸 뒤 567천만 년(혹은 84천 세)이 지난 다음 세대에 이 사바 세상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 내려와 부처님이 되어 석가가 못다 제도한 중생들을 모두 제도한다는 미래불이다. 이렇게 볼 때 미륵은 보살과 붓다의 두 가지성격을 갖고 있으며 그 모습 또한 보살상과 불상 두 가지 형태로 조형화된다.

최근 인도 시크리에서 2세기 후기의 미륵상이 출토되었고 그밖의 다른 지방에서도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인도에서는 2,3세기경 미륵 신앙이 꽤 활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어 삼국시대부터 열렬히 신앙되고 미륵상도 제작되었다.

 

소의 경전과 성격

 

미륵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경전은 <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줄여서 <상생경>이라 함), <불설미륵하생성불경(佛說彌勒下生成佛經)>,(줄여서 <하생경>이라함), 그리고 <불설미륵대성불경(佛說彌勒大成佛經)>(줄여서 <성불경>이라 함)으로 이들을 합하여 미륵삼부경이라 부른다.

 

미륵은 현세에 부처가 되려고 도솔천의 내원궁에서 수행하며 모든 천중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는데, 예전에 석가가 불()이 될 시기가 되었을 때 도솔천에서 흰 코끼리로 화하여 인간 세계에 하생하여 마야부인에게 탁태(托胎)한 것처럼 미륵도 석가가 이 세상을 떠난 뒤부터 567천만 년 뒤에 우리들이 사는 염부제(閻浮提)에 와서 바라문의 여자에게 탁생(托生)한다. 이윽고 이 세상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 미륵은 용화수 아래에서 3번에 걸쳐 인연있는 사람들에게 설법하는데 이것을 용화삼회(龍華三會) 혹은 미륵삼회(彌勒三會)라 부른다. 그때 세계는 6()으로 진동하고 금색이 되며 미륵은 이 세상에 6만 년 동안 머물며 많은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미륵하생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미륵이 세상에 내려와 부처가 되어 이 세상을 미륵정토(彌勒淨土)로 만든다는 것이다. <미륵상생경>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석가 재세시의 설법을 직접 듣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따라서 미래불인 미륵을 믿고 용화삼회의 설법에서 미륵을 만나 구원받고자 한다. 그러나 용화삼회는 먼 미래의 일이므로 우선 우리는 열심히 수행하고 선근(善根)을 쌓아 죽은 뒤 도솔천에 상생하여 미륵 옆에서 지내다가 미륵이 하생할 때 그를 다라서 지상으로 돌아와 미륵의 최초 설법을 청문하고자 한다.

 

이렇게 볼 때 미륵 신앙은 상생 신앙과 하생 신앙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상생 신앙이 하생 신앙보다 늦게 성립된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미래의 구세주로서 미륵의 하생은 너무도 먼 미래의 일이어서 현재의 사람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죽은 뒤 곧바로 미륵보살이 사는 도솔천으로 상승한다는 상생 신앙이 성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미륵 신앙의 또 다른 특징은 천상(天上)과 지상(地上), 두 곳의 정토를 갖는다는 점이다.

도솔천은 육욕천(六欲天)의 하나로 엄밀히 말해 아미타의 극락정토 등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러나 사후 왕생에 의해 도달하는 세계라는 의미에서는 실제 신앙적인 면에서는 큰 차가 없이 정토의 세계로 믿어져 왔다. 이러한 천상의 정토인 도솔천에 대하여 지상의 정토는 경전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미륵이 이 세상에 하생하여 용화삼회의 설법을 할 때 세계가 진동하고 금색이 되는 등 미륵불이 사는 지상의 정토로 되는 것이다. 곧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정토화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미륵 사상은 일찍부터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신앙되었다. 특히 언젠가는 미륵이라는 구세주가 나타나 인간을 구원하고 이 세상을 정토로 만든다는 생각이 현실적으로 민중의 가슴에 크게 부각되어 미륵 신앙은 삼국시대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도 가장 친근한 신앙으로 끊임없이 믿어져 왔다.

더구나 미륵 하생 신앙을 더욱 발전시켜 그러한 때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한다면, 미륵 신앙은 미래의 신앙이 아니라 현세적인 신앙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를 통해 볼 때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스스로 미륵이라고 자처하고 미륵정토를 실현한다면서 민중의 지지를 호소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신라 말에 자신을 미륵이라 자칭하며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했던 궁예(弓裔)가 그 좋은 예다.

미륵 하생 신앙은 미래의 구제에서 현세의 구제로 점차 변화하여 현세 신앙화되었고 또한 일상 생활에서 미륵 세계의 출현을 바라는 민중들에게 민간 신앙화되어 불교의 여러 신앙 형태 가운데 가장 친밀한 신앙이 되었다.

 

형상의 특징과 주요 작품

 

상생 신앙과 하생 신앙으로 대별되는 신앙의 성격상 미륵은 여래형과 보살형 두 가지 형태로 조형화된다.

 

여래형

금산사 미륵장육존상

 

여래형의 미륵상은 삼국시대부터 많이 제작되었는데 대부분이 일반적인 여래의 모습으로 표현되며 수인은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을 짓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륵불의 조상 기록은 많이 전하고 있지만 현존하는 삼국시대 미륵불상 가운데 신라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경주의 단석산 신선사 마애삼존불과 경주 남산 출토 삼화령 미륵세존 등이 있다. 이밖에도 고구려 작품으로 현재 불상은 없고 광배만 남아 있는 영강7년명 금동 광배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미륵존상의 광배임을 확실히 하고 있다. 백제 역시 미륵사와 같은 대규모 미륵 도량을 건립한 것으로 미루어 미륵 신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미륵불 가운데 좌상으로는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의 마애 미륵불 좌상과 법주사 마애 미륵 의좌상 등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충북 중원군 미륵당리 석불은 거대한 규모의 미륵불로 유명한데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대규모의 불상이 많이 제작되어 주목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미륵상으로는 조선조 3대 미륵도량의 하나인 전북 김제 금산사(金山寺) 미륵전의 주존으로 봉안된 거대한 미륵삼존상이 유명하다. 원래 금산사에는 신라시대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 시주(始鑄)되어 혜공왕 2(766)에 완성된 불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정유재란으로 불에 타버려 현재의 삼존상은 1627년에 다시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본존불은 1938년에 재조성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미륵 신앙은 민중과 밀착되었는데 마을마다 석상을 만들어 미륵이라 칭하며 득남(得男)과 치병(治病) 등을 기원하였다. 이렇듯 미륵 신앙은 점차 현실 구복적인 신앙으로 믿어졌고 무속(巫俗) 등과도 결합되어 민간 신앙화한 경향도 보인다.

 

보살형

 

보살형은 반가사유 미륵보살상과 일반 보살상의 두 가지 형태로 조형화되었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은 미륵보살의 독특한 도상으로 주로 삼국시대에 조성되었다. 결가부좌(結跏趺坐)에서 왼쪽 다리를 풀어 아래로 내린 반가좌의 다리 모습에 왼손으로는 왼쪽 무릎에 놓인 오른쪽 다리의 발목을 잡고 오른팔의 팔꿈치를 무릎 위에 대고 손으로 약간 숙인 얼굴을 가볍게 받치는 자세의 반가사유상은 고요히 명상에 잠긴 보살의 모습을 매우 적절히 표현한 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깊은 사유에 잠긴 성도(成道) 이전의 석가(싯달타 태자)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얼굴과 신체도 흔히 소년의 모습으로 표현된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에서 미륵반가사유상은 6,7세기 삼국시대에 활발히 제작되었다. 고구려의 작품으로는 평양 평천리(平川里)에서 출토된 금동 미륵반가상(국보 118)이 현재로는 유일한 것이다. 도상은 전형적인 미륵반가사유상의 것이며 굴곡이 없는 가냘픈 신체와 얼굴은 소년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얼굴에는 깊은 사유에 빠진 진지한 구도 정신이 배어나는 듯하다.

백제의 작품으로는 서산 마애삼존불의 좌협시인 미륵반가사유상을 우선 손꼽을 수 있다. 미륵반가상과 입상의 보살을 좌우 협시보살로 한 독특한 삼존 형식의 이 마애불은 양감있는 신체 표현, 미소를 머금은 동안의 둥근 얼굴, 자연스럽게 흐르는 옷주름의 표현 등에서 백제인의 우수한 조각 기술을 감지할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중후하면서도 명랑한 인상이 느껴진다.

현존 미륵반가사유상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신라의 작품이다. 석상으로는 경북 봉화에서 출토된 반가사유상(경북대학교 박물관)과 송화산(松花山) 석조반가상(국립경주박물관)이 대표적인 것이다. 봉화 출토 반가상은 상반신이 없어진 현재의 높이가 1.75미터로 현존 최대의 반가상이다. 비록 손상이 많지만 옷주름의 사실적인 처리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수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마애 반가상으로는 단석산 신선사 마애 불상군과 중원 봉황리 마애 불상군의 반가사유상이 있는데 6,7세기 삼국시대의 작품이다.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78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83호)

 

반가사유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국립중앙박물관의 국보 78호와 국보 83호의 두 금동 반가사유상일 것이다. 이들은 출토지가 불분명하여 그 국적과 제작 연대에 관해 여러 견해가 있다.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치밀하게 장식된 탑형관 또는 일월식삼산관 등으로 명명되고 있는 보관을 쓰고 있다. 긴 눈썹과 눈, 오똑한 콧날 그리고 미소를 머금은 입 등 예리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얼굴은 내면으로 침잠하여 깊은 법열에 빠져 있는 보살의 표정이 훌륭하게 표출되어 있다.

어깨에서 앞뒤로 길게 내려진 옷자락은 세장한 신체를 더욱 가냘프게 보이게 하지만 날개짓처럼 어깨 좌우로 뻗쳐진 독특한 천의 자락이 여기에 변화를 주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어깨를 덮고 좌우로 뻗쳐진 이 천의의 양식은 중국 동, 서위의 반가사유상에서 유래된 양식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릎과 대좌에 표현된 곡선의 옷주름은 매우 절도 있는 선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 반가상은 균형 잡힌 자세와 각 부분의 섬세한 표현 그리고 예리하면서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은 조각술 등 맹 훌륭한 조형성을 갖춘 반가사유상이다. 6새기 말에서 600년경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상은 대개 신라작으로 보고 있으나 고구려 작품일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국보 83호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3개의 반원형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형태의 삼산보관을 쓰고 있는데 78호 반가상과 비교해 볼 때 형태나 묘선이 매우 단순화되어 있다.

소박한 형태의 보관과 단순한 목걸이, 나신의 상체는 장식성이 거의 배제된 매우 단손화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미소를 머금은 깊고 온화한 표정, 균형 잡힌 안정감 있는 자세 그리고 자연스러운 옷주름의 절제된 표현 등 전체적으로 매우 우아하고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우리나라 반가상의 최고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이 상의 제작자에 대한 견해가 백제 또는 신라로 엇갈리지만 신라작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더구나 이 반가상은 일본 광륭사(廣隆寺) 목조 반가사유상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사한 양식을 보이고 있는데 광륭사의 상은 신라에서 전래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여 이 금동 반가상이 신라작이라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미를보살은 반가사유상의 형태 외에도 일반 보살상의 형태로도 조상된다. 특히 미륵보살은 법상종(法相宗)의 주존불로서 신앙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감산사(甘山寺) 석조 미륵보살 입상(국보 81)이다. 719년에 제작된 이 상은 삼곡 자세(三曲姿勢 三屈姿勢 Contrapposto), 미소를 머금은 풍만한 얼굴과 양감 있는 신체 그리고 정교한 장식과 유연한 옷주름 표현 등 8세기 통일신라 조각술의 우수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현재 머리가 없지만 경주 남산 용장사지의 미륵장륙존상은 법상종의 조사인 태현(太賢) 스님의 원불(願佛)로서 조성된 미륵보살상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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