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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산 가는 길02

취미활동/등산

by 빛살 2017. 10. 30.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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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룡암

옥룡암으로 들어가는 다리인 <안양교>, 안양(安養)은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정토를 뜻한다.

이 다리를 건너면 바로 극락.


1936년(32세): 7월 동해송도원(포항 소재)에서 휴양

                      8월 경주 옥룡암에서 휴양

1939년(35세): <청포도> 발표

1942년(38세): 포항 기계 현내 이영우 집에서 머물다가 7월 신인사지(神印寺址, 옥룡암)에서 3개월간 요양

                      이규인(수봉재단-경주중·고- 설립자) 후원, 이식우(수봉의 족질, 수봉재단 2대 이사장)가 도우미 역할을 함


육사는 이곳에서 요양을 하며 그의 대표작 청포도를 지은 것 같다.

하지만 육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향촉과 공양을 올리며 염불과 의식을 맡아보는 스님(노전, 부전 스님)의 숙소인 일로향각(응향각)의 편액 '一爐香閣'의 글씨체가 낯익었다. 서예를 잘 모르는 나도 추사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추사가 이곳까지 와서 글씨를 남겼겠는가 의심을 하며 나중에 찾아보니 영천 은해사의 것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옥룡암은 건물들도 아담하고 육사가 머물렀을 요사채는 퇴락해 어쩐지 쓸쓸한 느낌마저 들었다.



*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높이 약 10m, 둘레 약 30m의 바위 면과 주변에 새겨져 있는 여러 조각상을 말한다. 통일신라시대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남쪽에 삼층석탑이 있어 <탑곡>이라 불린다.

지금까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모두 34점의 도상이 확인되었는데, 이와 같이 여러 상이 한자리에 새겨진 예는 드물다고 한다.



* 마애불상군 북쪽 면

구층목탑과 칠층목탑 사이에 연꽂 위에 앉아 있는 석가여래가 천개(天蓋)와 함께 새겨져 있으며, 탑 앞에는 사자 두 마리(아사자, 훔사자)가 있다. 목탑 위로는 비천상이 있다. 2기의 목탑은 세부적인 표현이 충실하게 나타나 있어 현존하지 않는 신라시대의 목탑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석가여래가 보살과 아라한에게 설법하는 영산정토를 표현했다고 한다.

 


*마애불상군 동쪽 면

아미타여래삼존상(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대세지보살)이 있는데 우 협시보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서방정토를 표현하고 있다.



* 마애불상군 남쪽 면의 삼존불상. 어떤 부처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명상에 잠긴 스님, 하반신은 흙에 묻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입체 여래상, 대석에 발만 새기고 하나의 돌에 부처를 조각해 대석의 홈에 끼워넣었다.

손 모양(수인)은 항마촉지인과 비슷하나 이 수인은 좌상에만 나타난다.

왼손을 배에 대고 있어서 출산과 관계되는 부처로 추측하고 있다.

여래상 좌측 뒤 바위에 감실 안의 스님 모습이 보인다.



마애불상군 남쪽 면 전체적인 모습



입체 여래상 동남쪽에 있는 삼층석탑, 이 탑 때문에 탑골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 마애불상군 서쪽 면

동쪽 유리광세계를 주관하는 약사여래상으로 추측한다.

북쪽 정면의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하면 이쪽은 왼쪽은 왼쪽은 방향으로 동쪽이 된다. 




*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신라시대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있는 석불좌상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석불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이라고 한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가여래좌상으로 미남이시다.


보리사까지 올라가는 길이 제법 가파르다.

비구니 사찰답게 깨긋하게 정돈된 경내를 지나 가장 윗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남산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절이라고 하는데 전망이 괜찮아 잠시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도 좋은 곳이다.


절 입구에 보리사 마애불좌상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있었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그냥 내려왔다.



* 헌강왕릉

신라 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을 모신 곳이다.

헌강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주인공인 경문왕의 태자로 문치(文治)를 잘 했으며, 이 시기에 처용가와 처용무가 만들어졌다.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어 거리마다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국력이 쇠퇴하는 시기임을 보여주듯 왕릉치고는 규모가 아담하다.


삼국사기에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된 것을 근거로 헌강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왕릉 중에서 주인이 확실한 것은 몇 기 안 된다고 한다.



* 정강왕릉

신라 50대 정강왕(재위 886~887)이 모셔진 곳이다.

정강왕은 헌강왕의 아우로 재위 기간이 만 1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의 여동생인 김만이 왕위를 계승하여 진성여왕이 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진성여왕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최치원이 남긴 글에서는 성군(聖君)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을 근거로 정강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헌강왕릉에서 가깝다.



* 서출지 옆에 서 있는 고목. 거대한 뿌리가 있어서 이런 모습이 가능하겠지.


-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는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 김수영, <거대한 뿌리> 중에서-



* 서출지(書出池)의 유래

<삼국유사> 기이(紀異) 1 사금갑조에 실려 있다.


21대 소지왕(재위 479~500) 10년 정월 보름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으로 행차하였다가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여, 기사(騎士)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하였다. 기사는 도중에 돼지 싸움을 구경하다가 까마귀의 행방을 놓쳐 버렸다.


이 때 못에서 한 노인이 나와 봉투를 주기에 받아 보니, 겉봉에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안 열어 보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이상히 여겨 그 봉투를 왕에게 바쳤더니, 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열어 보지 않으려 하였으나, 일관(日官)두 사람은 보통 사람이고 한 사람은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니 열어 보셔야 합니다.” 라고 아뢰므로 봉투를 열어 보니 거문고 갑을 쏘라(射琴匣)’고 쓰여 있었다.


이에 왕이 활로 거문고갑을 쏘았는데 그 안에는 왕비와 정을 통하던 중이 있었다. 그 중은 장차 왕을 해치려고 숨어 있던 차였다. 왕은 중과 왕비를 함께 처형하였다.


이러한 일로 매년 정월 상해일(上亥日상자일(上子日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하며, 정월 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으며, 그 못을 서출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 이요당(二樂堂)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任勣)이 지은 건물. 임적은 가뭄이 심했을 때 땅 밑의 물줄기를 찾아내어 이웃마을까지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평소 가난한 사람을 많이 도와 덕망이 높았다고 한다. 오산요수(樂山樂水)에서 '이요'라는 말을 땄으며, 남쪽 양피못  옆에는 임적의 아우 임극(任勀)이 지은 산수당(山水堂)이 있다.



* 남산동 동 ·서 삼층석탑

동탑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 양식, 서탑은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몸돌을 쌓은 일반적인 형태로 윗기단의 몸체에 팔부신중을 돋을새김한 것이 독특하다.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였으며 탑을 부처님이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다.



* 양피저수지와 산수당



乍晴乍雨 / 金時習

乍晴乍雨雨還晴  / 天道猶然況世情

譽我便是還毁我  / 逃名却自爲求名 

花開花謝春何管  / 雲去雲來山不爭 

寄語世人須記認  / 取歡無處得平生


길 가 한옥 담벽 앞에 있는 시비다.

'사청사우'는 잠깐 맑았다가 잠깐 비가 내린다는 뜻으로 변덕이 심한 세상 인심을 표현한 말이다.

부조리한 세상을 비웃으며 평생을 허허로이 지낸 김시습.

이곳 남산에도 그의 흔적을 남겼다.

용장골에 가면 그의 호를 딴 <설잠교>가 있고, 금오신화를 썼다는 <용장사터)가 있다.



* 염불사의 유래

'삼국유사 권제5 피은(避隱) 제8  염불사(念佛師)'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남산(南山)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 있고, 그 마을에 절이 있는데 피리사(避里寺)라 했다. 그 절에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성명은 말하지 않았다. 항상 아미타불을 외어 그 소리가 성(城) 안에까지 들려서 360방(坊) 17만호(萬戶)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 한결같았다. 이로써 그를 이상히 여겨 공경치 않는 이가 없었고, 모두 그를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은 뒤에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 안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를 염불사(念佛寺)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는데 이름을 양피사(讓避寺)라 했으니 마을 이름을 따서 얻은 이름이다. 


* 남산 전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

 석탑 2기 모두 무너져 있었으며, 7세기 말 또는 8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탑의 석재는 1963년 북국사 역 앞으로 옮겨져 도지동 이거사지 삼층석탑의 1층 옥개석과 합하여 새로운 탑을 세우는 데 이용되었으며, 이후 염불사지 삼층석탑 복원 공사를 위하여 2008년 1월에 해제하였다. 2009년 1월에 동·서 삼층석탑의 복원 공사를 완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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