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月印千江) / 정찬주 / 작가정신 / 2014.09.30.
한글 창제와 관련된 숨은 이야기를 다룬 <시도요체의 비밀>이라는 소설을 읽고 신미대사에 관한 글을 찾다가 <천강에 비친 달>이라는 소설을 알게 되었다. 마침 집 근처에 있는 양학동 부학작은도서관에 있다는 것을 알고 빌려 읽었다. 작은도서관에서 빌린 첫 번째 책이다.
<시도요체의 비밀>은 민족주의적 관점이 강하고, <천강에 비친 달>은 불교적 색채가 더 짙다. 주인공도 세종에서 신미대사로 바뀌었다.
나옹 혜근 스님(1320-1376)은 1347년 원나라로 건너가 법원사에서 인도 승려 지공대사에게 2년간 불법을 배우고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무학 자초 스님(1327-1405)도 1353년 원나라로 가 지공의 가르침을 받고 나옹 스님과 인연을 맺어 후에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기화(법호 - 득통, 함허, 무준 1376-1433)은 무학의 법통은 이어받고 수암 신미대사의 스승이 된다. 함허는 신미대사에게 범어를 익히게 한다.
세종 때 일본은 대장경을 요구한다.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던 조선에서는 대장경이 필요없다는 이유로 유학자들은 줘 버리자고 한다. 그리고 한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민중들에게는 쓸모 없는 것이라며 안타까워하는 세종에게 신미는 대장경과 유교 경전을 쉽게 읽을 수 있는 우리 문자를 만들자고 세종에게 건의한다. 신분상으로 볼 때, 당시의 사상적 환경으로 볼 때 이것은 지나친 상상 같다..
세종은 신미에게 한글 창제를 명한다. 세자(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등의 도움을 받아 신미대사는 비밀 작업을 한다. 소리글자인 범어(범자)와 파스파문자 등을 바탕으로 아,설,순,치,후,반설,반치음의 7음 체계와 합용, 조합의 원리를 파악했으나 글자 모양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이에 세종은 자음은 발음기관을 상형하고 모음은 천지인 삼재를 본떠 자모를 만들어보라고 명한다. 이에 신미는 왕자들과 공주의 도움을 받아 훈민정음을 완성한다.
사진은 훈민정음 창제를 신미대사가 도왔다는 근거로 내세우은 <원각선종석보> 언해본(반포 8년 전, 1438년 간행)이다. 아직은 진본 여부가 불명확하다고 한다.
작품 속에 석가모니는 동이족으로 범어와 한국어는 한 뿌리라는 말도 나오는데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유학자들의 드센 반대 속에서도 꿋꿋하게 한글을 창제한 세종의 저력은 스스로 밝힌 대로 자주·애민·실용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중에서도 애민정신이 눈물겹다. 세종은 관기(官妓)를 없애려고 했는데 유신(儒臣)들이 반대해서 못했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 성군(聖君)이라고 칭할 만하다.
세종과 유학자들의 갈등을 보면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다.
사진은 법주사 복천암 혜각존자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1480) 존영(尊影)이다.
'선교도총섭밀전정법비지쌍운우국이세원융무애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
세종이 내린 법호(法號)이다.-'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는 문구를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 동안 짧은 내 소견으로 훈민정음은 세종의 단독 창제, 해설서인 해례본은 집현전 학사들의 협찬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세종의 음성학적 지식과 추진력이 초인적이라고 찬탄했었는데 일정한 부분을 신미대사가 담당했다고 하면 그럴 수 있겠다고 고개가 끄떡여진다.
수양대군의 <석보상절>, 세종의 <월인천강지곡>, 세조의 친불교적 성향이 이해가 된다.
<시도요체>를 통해 <태종>의 애민과 자주정신을, <천강을 비친 달>을 읽으면서 신숙주의 <실용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