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부터 보았다.
이탈리아 북부의 휴양도시.
태양,나무와 풀 냄새, 지중해, 물, 벌거숭이...........
바람에 흔들리며 햇살에 부서지는 나뭇잎이나 물결의 일렁임처럼
청춘의 원초적인 감정들이 눈부시게 흩어져 굳어진 기억들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 같은 영화였다.
하지만 남자들끼리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불편했고,
올리버의 결혼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엘리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장면으로 끝나 엘리오의 사랑도 한 때의 불꽃 같은 열병으로 생각했다.
책을 잡았다.
300여 쪽의 분량이라 쉽게 읽힐 줄 알았는데 일단 글이 빽빽하고 낯선 단어들이 많아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씩 매끄럽지 못한 문장 때문에 흐름이 끊기기도 했다. 이럴 땐 원서로 읽는 사람들이 무척 부럽다.
첫사랑의 설렘, 불안, 초조, 기쁨, 황홀 등이 그대로 묻어나는 문장들.
1980년대 중반, 금지된 사랑이 햇살 가득한 자연 속에서 문학과 철학, 음악, 미술, 역사와 어우러져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었다.
"나중에!" 그 한마디, 그 목소리, 그 태도.
헤어질 때 '나중에'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굳이 다시 만나거나 연락하고 싶지 않다는 무심함을 가린 냉정하고 퉁명스러우며 어쩌면 상대방을 무시하는 듯한 말이라고 여겼다.
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기억이 바로 이 한 마디다.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해 울려 퍼지는 듯하다. 나중에!(10쪽, 본문 첫머리)
'나중에!'는 상황을 말끔하게 끝내지도, 여운을 남기지도 않았다. 그냥 갑자기 쾅하고 닫아 버렸다.(47쪽)
'나중에!'는 작별이 아니라 곧 돌아오겠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아버지는 올리버가 '나중에!'라고 거칠게 말하는 이유에 대해 "수줍어서 그래."라고 설명했다.(48쪽)
"나중이 아니면 언제?" 아버지는 그 말을 마음에 들어 했다. "나중이 아니면 언제?" 랍비 힐렐의 '지금이 아니면 언제?'를 흉내낸 말이었다.(70쪽)
-1980년대 중반(136-137쪽 아르망스), 17세 엘리오는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 북부 B에 있는 여름 별장에서 음악 편곡, 독서 등을 하며 한가롭게 지내고 있다. 6월 하순, 24세 대학원생 올리버가 여름 손님으로 와 6주간 머물면서 책을 쓴다. 엘리오는 처음 본 순간부터 올리버가 좋았다. 그러나 인사도 하지 않을 정도로 살갑게 대하지 않는다.
'나중에'라는 말 속에 지금 해야할 일을 여러 가지 제약으로 미루어 놓는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나중이 아니면 언제?'는 지금은 할 수 없다는 뜻이고.
萬物流轉을 설파한 헤라클레이토스를 자주 언급하는 장면에서도 올리버의 사랑은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푹 빠지면 상대방도 푹 빠진다는 법칙이 어딘가에 있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다(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결코 놓아주지 않으니). <지옥>편에서 프란체스카는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 그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희망을 갖고 기다려 보자. 나는 희망을 가졌다. 어쩌면 내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은 영원히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르지만.(44쪽)
-엘리오의 사랑의 감정은 오래갈 것 같은 느낌이다.
모네의 언덕에서 둘은 첫 키스를 한다.
그림 <모네의 언덕>은 올리버가 엘리오의 집을 떠날 때 가지고 간다.
나중에 뒷면에 '마음 중의 마음'(307쪽)이라는 글을 써 넣는다.
'마음 중의 마음'은 퍼시 셸리의 시신을 발견한 후 아내 메리(프랑켄슈타인의 저자)와 친구들이 한 말이라고 한다.
마르지아와의 관계, B에 있는 서점에서 시집 <사랑한다면, 이런 게 사랑이라면> 북 파티에서 책 선물.
-양성애자. 보조적 인물. 어쩌면 올리버도 이성 애인과 엘리오 사이를 오갔을지도 모르겠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 줘.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 태어나 처음 해 본 일이었다. 그를 내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 나는 그 전에, 어쩌면 그 후에도 타인과 공유한 적이 없는 영역으로 들어갔다."(173쪽)
-신성우의 서시, "너는 내가 되고 나도 니가 될 수 있었던 수많은 기억들~", 알렉산더와 헤파이스티온
전혀 싫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은 싫은 것 이상이었다. 기억하기도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냥 없었던 일로 치워 버리고 싶었다. 경험해 본 결과 나하고 맞지 않으니까 물려 달라고, 맨발로 발코니에 나가기 전으로 시간을 돌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더 이상 앞으로 가지 않고 평생 모른 채로 궁금해할 것이다. 지금 이런 기분을 느끼느니 평생 내 육체와 싸우는 편이 나았다. 엘리오, 엘리오, 우리가 경고했잖아, 안 그래?(176쪽)
3년 전 웬 젊은 남자가 자전거에서 내려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고, 그 행동은 내가 의식하지 못한 무언가를 뒤흔들었다.(178쪽)-223~224쪽에서 상술
-동성에 관한 묘한 감정의 시원
취하게 되는 그와의 시간 이후에는 언제나 이렇게 고독한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 마르지아와 사랑을 나누면 왜 이런 느낌이 안 들지? 마르지아를 선택하는 게 맞다고 자연이 나에게 알려 주는 것일까?(193쪽)
- 동성과 이성에 대한 갈등
욕망이 아닌 감정으로 하는 첫 번째 키스였다.(198쪽)
-원초적 욕망을 넘어서는 사랑
로마에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지막 파티에 참가한다.
<사랑한다면>의 작가를 만나 산클레멘테 신드롬에 대해서 듣는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모든 경험이 그렇듯이 나는 속이 드러난 채로 끌어당겨졌습니다. 이게 평생 나라는 존재의 전부입니다. 일요일 오후면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노래 부르거나 채소볶음 요리를 하는 나, 추운 밤 잠에서 깨어나 스웨터 위에 담요를 걸치고 책상 앞에 앉아 남들이 모르는 나에 대한 글을 쓰는 나, 타인의 알몸과 함께 알몸으로 있기를 갈망하는 나, 수많은 조각으로 나뉘어 저마다 다 나라고 소리치는 나. 나는 그것을 산클레멘테 신드롬이라고 불렀습니다."(243쪽)
끔찍한 향수병이라는 설명이 있다.
그녀는 또다시 나를 속여 넘기고는 거리낌 없이 킥킥 웃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내 핸드백 좀 봐 줄래요?'
그녀는 자신의 물건을 봐 달라고 부탁하지 않으면 그 사이 내가 계산하고 나가 버릴 줄 알았던 겁니다.
요약하자면 이게 바로 내가 산클레멘테 신드롬이라고 부르는 일입니다.(248쪽)
-나를 붙잡아 두는 그 무엇.
나는 땅에 대한 토속 신앙에 가까운 마음으로 태양을 사랑했다. 내가 그토록 땅과 태양, 바다를 사랑하는지 몰랐다. 사람과 사물, 심지어 예술마저도 그 다음인 듯했다. 아니면 내가 나 자신을 속이는 걸까?(271쪽)
-태양의 나라
"너희 둘은 아름다운 우정을 나눴어. 우정 이상일지도 모르지. 난 너희가 부럽다.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대부분의 부모는 그냥 없던 일이 되기를, 아들이 얼른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랄 거다. 하지만 난 그런 부모가 아니야. 네 입장에서 말하자면 고통이 있으면 달래고 불꽃이 있으면 끄지 말고 잔혹하게 대하지 말라. 밤에 잠을 못 이룰 만큼 자기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건 끔찍하지. 타인이 너무 일찍 나를 잊는 것 또한 마찬가지야. 순리를 거슬러 빨리 치유되기 위해 자신의 많은 부분을 뜯어내기 때문에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마음이 결핍되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시 시작할 때 줄 것이 별로 없어져 버려. 무엇도 느끼면 안 되니까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건 시간 낭비야!"(283-284쪽)
- 인상적인 부분. 고종석의 <어느 자유인의 죽음-독고 준>을 읽으면서 만약 내 딸이 레즈비언 부부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문했지만 그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었다. 여기서 그 답의 실마리를 찾는다. 우선 이해가 먼저다. 베르테르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금지된 사랑(동성애도 포함해서)이 비극으로 끝나는 이유는 엘리오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엘리오."
수화기 너머에서 부모님과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이름을 그런 식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엘리오."
나도 똑같이 말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이 내가 맞는다는 뜻에서 한 말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예전에 했던 놀이를 다시 불러일으켜 내가 그 무엇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올리버야." 그가 말했다. 그는 잊어버린 것이다.(293쪽)
"일부분은, 단지 일부분은 혼수상태였지만 평행적 삶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아. 더 좋게 들리거든.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두 개 이상의 평행적 삶을 가지고 있고, 살아간다는 거지."(305쪽)
-올리버는 결국 대부분의 사람에 속한다.
"당신은 내가 죽을 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에요. 그래야만 내 삶이 이치에 맞을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내가 아는 삶, 지금 당신과 이야기하는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가끔 꿈을 꿔요. B의 집에서 깨어나 바다를 내려다보는데 파도를 타고 '그가 어젯밤에 죽었어'라는 소식이 들려오는 꿈을요. 우린 너무 많은 것을 놓쳤어요. 그건 혼수상태였어요. 내일 나는 내 혼수상태로, 당신은 당신의 혼수상태로 돌아가겠죠. 실수, 기분 나빠하지 마요. 당신은 혼수상태가 아니죠."
"아니지. 평행적 삶이야."(305쪽)
나는 잠시 멈추었다. 당신이 전부 다 기억한다면, 정말로 나와 같다면 내일 떠나기 전에, 택시 문을 닫기 전에, 이미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이 삶에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장난으로도 좋고 나중에 불현듯 생각나서라도 좋아요,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을 테니까, 나를 돌아보고 얼굴을 보고 나를 당신의 이름으로 불러 줘요.(315쪽, 마지막 문단)
-비미니, 안키세스, 엘리오의 아버지만 빼고 떠날 때 그대로인 집으로 올리버가 20년 만에 찾아왔을 때 엘리오의 독백이다.
가슴이 먹먹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이 소설이 그림이라면 그림을 비추는 조명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동성애도 첫사랑의 애절함 속으로 녹아들게 한다. 첫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어려움을 더하는 동성애.
그래서 더 가슴이 아렸다.
사람도 사랑도 삶도 정말 다양하다.
"우주가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아름다운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그러면서도 우주는 활기차고 사무적이다. 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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