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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마음닦기/독서

by 빛살 2021. 5. 4.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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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임레 케르테스 작, 유진일 역/민음사/ 2020.09.25.

 

헝가리어 원제는 운명 없음, 운명은 없다의 뜻이라고 한다.

여기서 운명은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체념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죄르지 쾨베시(애칭 주르커, 케비슈톄르시)는 아버지와 새 어머니와 함께 산다. 양육권이 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이다. 재혼한 어머니와 일주일에 두 번 만난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생활이다. 

 

42-46쪽에 소녀와 논쟁하는 부분이 나온다.

자기 생각에 우리 유대인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데, 그 다름은 본질적인 다름이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이 유대인을 증오한다는 것이었다. 또 그렇게 다르다는 인식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특이한 일인데 어떤 때는 일종의 자부심을 느끼게도 하고 어떤 때는 창피함을 느끼게도 한다고 소녀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다름은 노란별처럼 개인이 아닌 외부세계가 판단한 것이라고 하자 소녀는 그 다름은 우리 안에 있다고 반박한다.

<왕자와 거지> 이야기처럼 상황이 사람의 특징을 결정한다고 하자 소녀는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가족에 대한 소속감이나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있다. 실제로도 유대인 성을 케르케스라는 헝가리식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 정체성 정치: 개인의 관심과 입장은 인종, 민족, 종교, 성 등의 중요한 기준으로 형성된다는 정치 견해

* 우생학: 나찌 유대인 집시 학살

* 문화상대주의

 

번디 치트롬이 가르쳐 준 바에 따르면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포자기하지 않는 것이다.(149쪽)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잘 씻는 것이다.(150쪽)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와 자기 존엄성

 

이 작품은 죽음의 수용소를 통해 사회적 힘과 폭력이 개인의 종말을 강요하는 시대를 고발하는 것이다.

사회적 힘과 폭력은 개인의 무관심과 순종으로 가능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면 절망한 일도 없는 법이라네,"(30쪽) 슈테이네르 아저씨의 말이다.

강제수용소를 추상체로 받아들이고 나치군의 만행에 침묵을 지킨 대부분의 헝가리인 모두가 암묵적인 공범이다.

* 나찌의 만행은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으며 많은 협조자들이 있었다. 심지어 유대인까지.

- 법의 근본정신(인간, 생명의 존엄성 보장, 공평한 조율)에 입각한 법치주의와 기계적인 법률 적용의 법률주의는 구별되어야 한다. 약자를 배제하는 법.

- 731부대 이시이 시로의 가족사진. 아우슈비츠 가스실 앞의 파티장. 트루만의 75회 생일(근대-생태문명)

- 악의 일상성(평범성)-영혼 없는 공무원

 

1944년 6월 30일 14살의 주인공은 체펠 섬 정유공장에서 노동봉사를 하다가 언드라시 헌병대로 끌려가 부더컬라스 벽돌공장, 아우슈비츠 비케르나우, 부헨발트, 차이츠, 부헨발트수용소에 있다가 독일군이 물러나자 1년 만에 부다페스트로 돌아온다.

 

다른 피도 없고 다른 사람도 없다. 다만.......나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과 그 안에 새로운 여건만 있을 뿐이라는 신문 기자의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나 역시 주어진 하나의 운명을 버텨냈다. 그것은 나의 운명이 아니었지만 나는 끝까지 살아냈다. 그들이 왜 내가 지금 그것을 품고 출발해 어딘가로 끼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281쪽)

운명이 있다면 자유란 없다. 그런데 만약(내가 점점 흥분하며 말을 이었다.) 반대로 자유가 있다면 운명이란 없다. 그 말은(여기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멈췄다.) 우리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282쪽)

그렇다. 어찌 보면 그곳에서의 삶이 더 순수하고 단순했다. 수용소에서의 모든 일이 다시 떠올랐다. 또 그곳에서는 별로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과 나의 관념과 실존 속에서만 존재를 증명해주는 번디 치트롬, 피에트하, 보후시, 의사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떠올랐다. 나는 처음으로 약간의 원망 어린 마음과 애정 어린 반감으로 그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제 우리 과장하지 말자!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284쪽)

여전히 수천 가지 기대로 충만한 거리들을 둘러보며 내 안에서 하나의 각오가 생겨나더니 그것이 점점 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도저히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삶을 지속해 가겠다는 각오였다.(284쪽)

- 운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곧 운명이라고 주장하며 사회적 폭력이 난무하는 강제수용소와 유사한 현대사회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는 것이다.

 

죽을 고생을 하고 돌아온 고향.

반겨주는 것은 없었다.

위로 받지 못하는 존재의 쓸쓸함과 서글픔이 나를 한참이나 우울하게 했다.

특히 변함없이 반복되는 일상이.......

-위로 없는 사회(힐빌리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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