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2016년 트럼프 당선 직후, 두 저자는 뉴욕 타임스에 "트럼프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가?"라는 제목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는 칼럼을 썼고 이것이 이 책으로 거듭났다고 한다.
극단주의 포퓰리스트들이 어떤 조건에서 선출되는지, 선출된 독재자들이 어떻게 합법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지 여러 나라의 사례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 준다.
미국은 1787년에 제정, 1789년에 공식적으로 채택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헌법을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 선진국이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의 뒷받침으로 200여년 이상 굳건하게 유지되어 왔다. 예를 들면 대통령 중임제는 '권력을 기꺼이 내려놓음으로써 권력을 얻는다'며 중임 후 물러난 워싱턴의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그 규범은 정당이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 관용과 이해,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이다.
정당 지도자는 서로를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였고, 그들에게 시한부로 주어진 제도적 권리를 오로지 당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용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반면 1030년대 유럽이나 1960년대와 70년대 남미에서 나타난 자멸적인 당파 싸움은 민주주의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민주주의 규범 침식은 당파적 양극화에서 비롯되었고, 극단적 양극화는 민주주의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오늘날 독재자와 민주주의 지도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비판에 대한 대응방식이다. 독재자는 야당과 언론 및 시민사회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을 권력을 이용하여 처벌한다.
전제주의 행동을 가리키는 네 가지 주요 신호(후안 린츠, 32쪽 도표)를 통해 독재자를 가려낼 수 있다.
1. 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2.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3.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고
4. 언론의 자유를 포함하여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정치인.
이런 사람은 민주주의의 문지기인 정당이 걸러내야 한다.
이런 사람의 대표격인 트럼프는 공직 경험이 없었다. 대중선동술과 이민자 및 이슬람인에 대한 극단주의적 입장, 시민사회의 규범을 경멸하는 태도, 그리고 푸틴을 비롯한 여러 독재자에 대한 칭찬은 혐오감을 자아냈다. 그러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정당의 문지기 기능의 마비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의 붕괴는 주류 정당이 극단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용기있는 지도자는 급박한 순간에 민주주의와 국가를 당의 이익보다 앞세우고, 또한 유권자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일반적인 민주주의 붕괴는 합법이라는 가면을 쓰고 심판(사법부)을 매수하고, 상대편 주전이 경기에 뛰지 못하도록 막고, 경기규칙을 고쳐서 상대편에게 불리하게 운동장을 기울이는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파괴자는 국가의 위기를 즐긴다.
근본적으로 헌법은 불완전하다.
헌법 조항의 문구를 있는 기계적으로 해석할 경우, 법의 취지를 훼손할 위험이 있다. 준법투쟁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1919년 바이마르 헌법은 훌륭했으나 1933년 히틀러 집권으로 파괴되었다.
불법만 아니면 뭐든 괜찮다는 생각이나 헌법적 강경태도는 극단주의를 부추긴다.
법의 근본정신(인간, 생명의 존엄성 보장, 공평한 조율)에 입각한 법치주의와 기계적인 법률 적용의 법률주의는 구별되어야 한다.
정치 경쟁자는 없애야 할 적인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경쟁자인가?
요즘 정치현실을 보면 적인 것 같다.
적으로 본다면 타협은 없다. 적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쟁으로서의 정치는 극단주의와 근본주의의 본질이다.
그러나 졍치에는 정답이 없다. 맥락과 상황에 따라 설득과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관용과 자제가 필요하다.
미국 정치 시스템을 떠받치는 규범은 인종차별에 의존해왔다. 미국 민주주의 규범은 차별에 근간을 둔 것이었다.
민주주의 병폐에 대한 해결책은 더 많은 민주주의다.
1861-65의 남북전쟁으로 인한 양당의 갈등은 1877년 대타협(헤이스의 타협, 인종 차별 외면, 민주당에 의한 남부 일당지배 인정)으로 완화되며 이때부터 관용의 규범이 나타난다. 짐 크로법 1876-1965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하다"는 흑인차별법인 짐 크로법은 1876년에서 1965년까지 지속된다.(영화, 그린북)
1964 시민권법, 1965 선거권법으로 미국은 진정한 민주국가가 되지만 정당의 중간층은 없어지고 양극화가 진행된다.
그동안 주류였던 백인 개신교 집단은 점차적으로 과반의 지위를 잃어버릴 불안(2044년 인구 중 50% 붕괴) 속에서 '진정한 미국인'이라는 의식과 '자기 땅의 이방인'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갖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극단적인 적개감을 갖게 되고 위대한 미국과 같은 구호에 쉽게 현혹된다. 보수적 언론과 전통산업을 배경으로 하는 재계의 도움으로 이들은 공화당으로 몰리게 되고 트럼프는 이를 적절하게 사용했다.(영화 힐빌리의 노래: 백인, 고졸, 개신교, 농업-시골, 주류에서 물러남)
트럼프의 우파 포퓰리즘은 정체성 정치(개인의 관심과 입장은 인종, 민족, 종교, 성 등의 중요한 기준으로 형성된다는 정치 견해)이다. 백인을 우선시하고 난민과 이민자 등 외부인을 공격한다. 진정한 미국인이 아니라는 뜻에서 근거없는 버서(birther,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미국 대통령 피선거권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운동으로 오마바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외부인을 이용한다는 면에서 북한과 중국을 들먹이며 상대방을 공격하는 우리 정치현실이 떠올랐다.
적으로 간주하고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상대방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지저분하게 싸워라"(데이비드 패리스)라는 말이 일반적인 대응책일 것이다.
그러한 대응은 전제주의가 등장할 가능성을 높여주고, 중도 진영을 위협함으로써 지지도를 떨어뜨리고, 상대방을 단결하게 만들며, 탄압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해 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저항은 기본적인 권리이자 중요한 책임이다. 하지만 저항의 목표는 권리와 제도를 뒤엎는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기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양극화를 해결하지 못하면 민주주의의 붕괴를 막을 수 없다.
미국의 양극화를 고착화하는 두 가지 요인인 인종적· 종교적 재편, 경제적 불평등에 집중해야 한다.
미국 사회의 뚜렷한 당파적 적대감은 최근 민족 다양성의 증가는 물론 경기 침체, 하위 계층의 임금 정체, 그리고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경제 불평등이 합쳐져 나타난 결과물이다.
보편 복지, 보편적 기본소득, 가족정책, 포괄적 노동시장 정책 등 사회적 불평등 해소가 시대적 과제이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위태로운 제도였다.
민주주의는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다.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그 운명은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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