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을 통해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지만 자신만의 특이성에 기반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겸손과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라캉은 프로이트를 재해석하고 구조주의 언어학으로 그의 이론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다.
임상실천으로서 정신분석의 커다란 특징은 치료 수단으로 언어만을 사용하고, 자유연상과 해석이라는 아주 단순한 과정만으로 분석 치료를 진행한다. 정신분석은 인간 내부에 무의식(자기 안에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그것이 그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무의식은 자기가 알고 싶지 않고, 모르는 채 지내고 싶은 것으로, 전문용어로 말한다면 억압된 것이다.
"마음의 치료"란 신체 의학처럼 신체의 일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사는 방식-윤리)"라는 인생의 근간을 이루는 문제와 마주하게 한다. '윤리'의 문제까지 파고들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오지 않게 된다.
과학적 이데올로기, 자본주의의 효율성, 理想이라고 생각하는 것 등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그것은 테러리즘이 되어버린다. "이것 이외의 사고방식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원리주의로 내달리게 되는 것이다.
라캉의 정신분석에는 질병의 분류로서 신경증, 정신병, 도착(+자폐증)이라는 세 가지 혹은 네 가지 범주가 있다. 모든 사람은 신경증자, 정신병자, 도착자(+자폐증자) 중에서 어느 하나로 분류되며,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보통 사람들은 신경증자이다. 이러한 분류는 인간의 '사는 방식'에 관한 구조를 포착하기 위한 것이다.
고통은 자신만의 '사는 방식'을 발견하지 못하고,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사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부담에서 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사는 방식'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점이 바로 정신분석의 목표이다.
"이것으로 됐다"고 납득함으로써 "나는 그런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다"라고 각성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나는 내가 원하는 사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라는 자신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해석은 의미를 잘라내는 일, 즉 무의미한 것을 분명히 밝히는 일이다. 환자는 분석가를 통해 자신의 사고나 행위의 무의식적인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분석 주체(분석하는 사람, 분석자)는 분석을 받는 사람이고, 분석가는 분석 주체의 자유연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시사해 주는, 방향 제시의 역할을 한다. 분석에서 해석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것'을 말하도록 환자를 부추기는 행위이다. 분석가(정신분석이 가져다 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가 환자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자 자신이 스스로 변화하도록 보조하는 것만 가능할 뿐이다. 분석가는 의미를 잘라내고, '좀 더 다른 것'을 이야기하도록 환자를 부추길 뿐이다. 그때부터 어떤 '새로운 것'이 나타날지의 여부는 환자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바로 이것이 환자 자신이 분석 주체라는 것의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을 특이성이라고 한다. 특이성은 타인이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일반론으로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러한 특이성 자체가 개인의 본질적인 부분을 형성한다. 타인을 이해하거나 공감한다는 것은 타인의 특이성을 말살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지향하는 것은 환자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환자의 특이성이다. 특이성이란 "타자가 뭐라고 말해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사고방식을 바꾸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자아(me)는 타자에 의해 객체화(대상화)된 자신으로 이차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주체(subject)는 자아의 억압을 벗어난 무의식의 주체로 실체가 없다.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생성되는 것으로, 순간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져버린다. 특이성을 배제시켜야만 무의식의 주체가 나타난다. 특이성과 일반성 사이의 충돌이 정리되지 않으면 근본적인 번민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충돌은 어느 한쪽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양자 사이의 좋은 교제 방식, 즉 친해지는 것으로 끝날 수 있을 뿐이다. 개성은 일반론으로 하나의 시점에서 취급되는 것인 반면에 특이성은 모든 일반론에서 벗어나는 과잉된 어떤 것을 말한다.
곤란한 점은 대타자에 의해 지지되는 자아의 개성이 우리에게 실마리가 된다는 점이다. 인터넷 등에 나도는 아무것도 아닌 중상 비방에 상처받는 것 역시 아직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확신이 불완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대타자에 의해 제시된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상상계는 이미지의 영역이다. 신체는 물리적 육체와 달리 여러 기관에서 얻은 감각적 이미지를 통일하는 기능이 있다. 신체의 기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체를 거울로 비추고, 통일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계기가 필요하다. 신경에 의한 신체의 통일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이미지를 이용한 통일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거울 단계)
상징계는 언어 구조의 영역이다.
기호는 지시 대상과 일대일로 대응하며 동물의 언어는 기호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인간의 언어를 구성하는 것은 시니피앙(signifiant)으로, 기호와 달리 물리적인 지시 대상에 대응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갖지 못하고 의미 작용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른 시니피앙과 연결되어야만 한다. 인간이 인식하는 현실이란 언어에 의해 구축된 현실이고, 물리적 세계와 그대로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이러한 언어를 가지고 세계를 인식한다. 언어가 고유의 세계를 형성함으로써 문화가 탄생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언어적인 방식으로 이미지를 받아들인다. 이미지의 경우에도 뒤의 이미지가 이어질 때까지는 앞의 이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확정할 수 없다.(예이젠시테인 몽타주 이론)
상상계는 상징계(인간의 표상 활동이 갖는 시니피앙적인 성질 전체)에 의해 조종된다.
상징계는 다양한 "규정[논리]"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상징계에는 "언어=문화=법"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상징계는 "언어의 세계"나 "대타자의 영역"이다.
현실계(실재계)는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과는 다른 영역으로 언어나 이미지를 벗어나는 영역이다. 상징계의 구조 자체에 뿌리를 내린 불가능한 모든 것(상징적인 것으로는 말해질 수 없는 영역)을 현실적인 것이라고 한다. 상징적인 것을 사용하면서 어떻게든 그것을 넘어선 현실계를 다루려는 것이 라캉의 정신분석이다.
자아가 성립하려면 자신을 대상화하는 계기가 필요하다. 라캉은 이러한 계기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아이의 체험에서 찾았다.(거울 단계, 생후 6~18개월) 그러나 거울에 비친 나는 자기 자신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없다. 거울상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other, 다른 것)이다. 이런 타자의 존재가 없다면 우리는 자아(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아볼 수 없다. 결국 자아는 타자가 있기에 성립하는 것이다. 거울상은 자아에 모습을 부여해주는 타자 일반을 지시한다.
거울 단계는 자아를 창출함과 동시에 어떤 근본적인 부조화도 만들어 낸다. 자기 자신과 타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울상 쟁탈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거울 단계늘 “二者=결투 관계”이다, 자신과 타자 사이에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혼합된 애증(자기애 narcissism과 증오)의 관계가 생성된다.
자아가 확립되려면 거울상만으로는 부족하다. 거울상만으로는 이자=결투 관계의 진창에 빠지게 될 뿐이다. 이런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다른 타자인 대타자가 필요하다.
타자는 자신과 같은 층위에 있는 타자, 대타자는 타자를 넘어선 절대적인 타자를 가리킨다.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대타자가 법을 가져오는 존재라는 것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머니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대타자)에게 생살여탈권을 맡겨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박탈된 상태(frustration)에 처해진 채 태어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질에는 근본적으로 박탈된 어떤 것이 있다. 인간은 본능이 망가진 동물인 셈이다. 본능이 있다는 것은 자연과 조화롭게 어우러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 비해 근본적으로 과잉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잉된 것은 언어이다. 언어를 갖는 인간에게만 무의식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무의식이라는 것은 언어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무의식은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언어라는 대타자의 세계에 내던져지고, 그에 따른 근원적인 부조화를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라는 조건에서 생긴다. 유아는 언어의 세계에 들어오면서 자아가 생기는 동시에 "자아와 양립하지 않는 무엇(주체)"이 생긴다. 무의식의 주체는 부조화 그 자체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대타자가 하는 말을 듣고, 다양한 말(시니피앙)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시니피앙은 무의식으로 이동해 버린다. 이런 과정을 억압이라고 한다. 언어의 세계에 참여함으로써 무의식의 주체가 탄생한다는 것은 무의식이라는 그릇이 만들어진다는 의미다. 이 그릇에 무의식적인 시니피앙이 저장되는 것이다. 이렇듯 무의식이 시니피앙으로 구성되는 한 무의식은 시니피앙의 법에 따라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아는 이러한 법을 못 본 척한다. 정신분석의 목적은 이미지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의 법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환자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분석의 현장에서는 언어의 의미(상상적인 것)를 사용하는 것을 중단하고, 언어의 시니피앙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의미를 잘라내고 시니피앙의 유희를 통해서 "완전히 새로운 것"이 출현하도록 한다. 이것이 무의식의 출현이기 때문이다. 자아의 검열로 억압된 시니피앙은 무의식에 저장되었다가 부분적으로 관련된 다른 시니피앙으로 모습을 바꾸어 자아의 눈을 속여 의식의 영역으로 떠오른다. 이것을 억압된 것의 회귀라고 한다. 회귀한 시니피앙을 무의식의 형성물이라고 한다. 무의식의 형성물을 실마리 삼아 억압된 시니피앙과의 연결을 회복시키는 일이 정신분석의 목표이다.
무의식의 형성물은 강박적인 기억의 형태, 신체 증상(히스테리), 꿈으로 나타난다. 꿈을 해석할 때 이미지는 시니피앙적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꿈이 만들어 지는 과정이다.
무의식의 형성물과 억압된 시니피앙과의 연결이 발견되면, 억압된 시니피앙을 인정하고, 무의식의 법을 갱신해야 한다. 무의식의 법이 변하면 그 시니피앙과 관련된 고통은 사라져버린다. 자아와는 다른 주체가 갑자기 드러난다는 점만으로도 고통이 완화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무의식의 주체가 법을 갱신하기 때문이다.
상징적인 무의식은 독립적이고 일관성을 지니며, 자신의 법을 실현하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때로는 파괴적인 성질마저 갖게 된다. 이는 라캉의 언어를 사용하면 편지=문자(시니피앙)는 반드시 수신처에 도착한다고 표현될 것이다.
같은 실수(실착 행위)를 반복하거나 비슷한 상대와 비슷한 유형의 파국을 반복하는 것(반복 강박)은 어떤 시니피앙이 인지되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이 여기 있으니 인지해달라고 매번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통은 억압된 시니피앙이 드러나고 법이 갱신될 때까지 계속된다. 시니피앙의 반복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법의 갱신이다.
최초의 대타자인 어머니는 아이를 보살피는 양육자 전반을 가리킨다. 아버지는 법을 주관하고(만들고) 주체를 거세하는 역할을 한다.
생물학적인 필요성을 욕구라고 한다. 유아는 대타자가 없으면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다.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이를 대타자에게 요구할 수밖에 없다. 욕구는 요구로 언어화되지 않으면 충족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이는 모두 언어의 세계로 들어간다.
욕구는 생물학적, (물리세계로서의) 현실적인 것이고 요구는 언어적이며 상징적인 것으로 둘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유아의 요구는 욕구를 떠나서 독자적인 것으로 바뀌는데 이것은 어머니의 사랑(관심)에 대한 요구를 의미한다. 처음에는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요구의 목적이었지만, 갈수록 욕구의 대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대타자에게 모든 존재를 내맡긴 유아는 대타자의 부재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대타자의 사랑을 요구하게 되고, 대타자는 언제나 옆에 있어야 한다. 대타자가 아이를 사랑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과자나 옷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옆에 있어주어야 한다. "사랑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다"(라캉)
욕구와 요구 사이의 간극에서 "욕망"이 생긴다. 욕망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이러한 간극을 메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욕망은 언제나 "다른 것", 이것이 아닌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무언가를 손에 넣게 될 때, 이미 다른 무언가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진짜로 즐거운 때는 아직 "자신이 원하는 것"이 수중에 들어오지 않고, 그것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을 때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욕구•요구•욕망이 단계를 거쳐 변해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작용한다.
어머니의 일시적 부재(변덕스러움)에 불안을 느낀 아이는 어머니를 붙잡아두려면 자신이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어머니의 관심을 받으려고 온 힘을 다하게 된다. ("어머니의 법에 종속된 주체") 아이가 어머니라는 대타자에 종속되어버리면 언제라도 어머니가 아이를 먹어 치우고(지배하고) 아이의 주체성을 빼앗아버릴 위험이 있다. 따라서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어머니의 법에 휘둘리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머니의 법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나려면 아버지가 나타나서 어머니의 법과는 다른 법을 제시하고 아이가 그것을 받아들여 한다.
상징적인 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한다. '법을 만들고 지배하는 가능 그 자체'(초월적 존재)를 의미한다. 아이가 법의 존재를 알고 법 안에서 살아가게 되려면 법을 담당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아버지의 이름'이다. 라캉은 아버지의 이름이란 '대타자의 대타자'(어머니라는 대타자에게 법을 부여하는 또 다른 대타자, 어머니를 보증하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단지 어머니의 말 안에서만 존재한다. 어머니라는 대타자가 따르는 법이 분명히 드러나는 말 속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부상하게 된다. 아이는 어머니가 사라지거나 다시 나타나는 것은 변덕스러움으로 자신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대타자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질서(법)를 따르고 있다는 점을 아이는 알게 된다. 법의 존재를 이해하게 됨으로써 아이도 역시 법에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고 더 이상 어머니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상징적인 아버지는 법을 보증해 주는 존재로 설정된 것이다.
아이가 아버지를 법을 가져오는 상징적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를 박탈하는 상상적 아버지로 이해하게 되면,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되찾으려고만 애쓴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는 모자 관계에 아버지가 개입함으로써 아이가 품게 되는 사랑이나 증오라는 관념의 복합체이다.(프로이트)
오이디푸스 제1단계(前 오이디푸스기): 욕구불만, 아버지에 대한 인식 없음
2단계(제2의 시점): 어머니의 변덕스러움(현전과 부재)을 통제하는 원인으로서 상상적 아버지의 존재 인식.
3단계: 상징적 아버지로 이해. 법을 받아들이는 단계. 어머니를 빼앗는 존재가 아니라 법을 베풀어 주는 존재로 변함. 콤플렉스 해소.
남자아이는 여자아이가 페니스가 없는 것은 누군가가 빼앗아 갔기 때문이라고 여기며, 자신의 페니스도 누군가가 빼앗아 갈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거세불안을 느낀다. 아버지를 자신을 거세시킬 수 있는 위협으로 생각한다. 이런 거세 불안으로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해소되며 성적인 정상화를 수행하게 된다.
팔루스(phallus)는 문화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의미의 남성 성기로 사회적인 힘, 남성적인 힘의 상징하며 욕망의 시니피앙 그 자체이다. 또한 어머니의 결여(=욕망의 대상) 그 자체이다. 아이는 자기 자신이 팔루스의 결여를 메우겠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자신을 팔루스에 동일화하려고 한다.
아이가 어머니의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거울 단계가 온다. 어머니의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아이는 자아를 갖게 되지만, 거기에서 생겨난 자아는 대타자의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탄생한 자아-어머니가 원하는 것으로 만들어진 이상적인 나-인 것이다.(전 오이디푸스기)
오이디푸스 2단계는 어머니에게 팔루스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의식하는 단계다. 원래는 있었으나 아버지가 빼앗아 가 일시적으로 결여되었을 뿐 돌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른이 되어서도 오이디푸스 제2단계에 머문 채 상상적 아버지를 향한 적의를 그대로 가지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팔루스가 없다는 것은 인간 세계의 섭리이다. 대타자의 세계에도 반드시 어떤 결여가 있다.
무언가가 잘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어떤 한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모두가 조금씩 나빠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고 자신은 무죄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희생양 논리이다. 상상적 아버지란 어떤 의미로는 세계의 "불완전함"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쓴 일종의 희생양이다.
3단계에서 어머니의 팔루스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라캉은 이를 거세라고 했으며, 거세란 대타자에게 팔루스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 자체를 의미한다. 아이는 아버지처럼 팔루스를 가지고 싶다는 이상을 품게 되고,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화함으로써 법을 받아들인다. 어머니에게 팔루스를 주는 과정이 우화되고 보다 간접적인 것이 됨으로써 아이는 문화적으로 되어 간다.(승화, 성적 에너지를 비성적인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것)
거세를 담당하는 아버지(현실적 아버지). 상징적 아버지(아버지의 이름)- 법을 좌지우지하는 존재, 상상적 아버지: 아이가 아버지를 박탈자로 오해하여 만들어낸 이미지
오이디푸스콤플렉스란 주체가 상상적 함정에서 벗어나 상징계에서 삶을 안정시키는 과정이다.
현실계(실재계)는 상징계가 취급할 수 없는 불가능한 영역이다. 무의식은 언어만이 아니라 향락과 같은 비언어적인 영역과도 관련되어 있다. 무의식의 이러한 부분을 현실적 무의식이라고 한다. 현실계 자체에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현실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언어를 개입시켜 변하게 할 수 있다. 정신분석의 실천이란 인간이 상징계를 통해서 현실계를 취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작업이다.(라캉)
상상계와 상징계는 '외관'이라는 이름 하나로 정리되고, 이와 대립하는 것을 통해서 현실계의 위치가 정립된다.
욕망은 시니피앙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으며, 상징계의 '법'을 따르는 것이다. 욕동(충동)은 언어의 '법'을 벗어나 넘쳐난 과잉이다. 이는 현실계에 속하는 것이다. 욕동은 만족을 향하여 인간을 나아가게 하는 근원적인 힘을 의미한다. 그것은 언어에 앞서 있는 근본적인 것으로 인간이 시니피앙의 주체가 되기 전부터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욕동의 만족을 '향락'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최종 목적이란 향락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은 ‘죽음 욕동’을 욕동의 대표로 생각한다. 욕동은 언제나 과거의 상태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생명체에게 과거의 상태란 생명 이전의 상태, 즉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욕동의 목표는 죽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위험한 행위를 기꺼이 하는 경우가 있다. 스페인 산페르민 축제의 소몰이 행사는 죽음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더욱더 매력적이고 숭고한 것이 된다.
쾌락 원리란 "긴장의 고조를 저하시킴으로써 쾌락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쾌락을 얻기 위해서는 긴장이 고조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향락은 반대로 긴장의 정도가 고조됨으로써 얻게 되는 기분 좋음이다. 따라서 향락은 단지 기분이 좋은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쾌락과 불쾌가 섞인 양가적인(ambivalent) 기분 좋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생의 욕동과 죽음 욕동은 대립하면서 병존하고 있다. 상징계의 법은 현실계의 향락으로부터 주체를 방어해 준다. 자아는 의식과 무의식, 법은 상징계와 위험한 향락 사이에 장벽을 쌓아 준다.
프로이트는 죽음 욕동을 본능으로 이해했지만 라캉은 사물 체험(원초적인 만족 체험)에서 유래한다고 보았다. 우리 모두는 태어남과 동시에 바로 사물을 체험한다. 이러한 원초적인 체험을 한 후에 우리는 죽음 충동에 이끌려 향락을 추구한다. 수유 체험은 손가락 빨기, 흡연 등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반복 행위가 원초적 만족 체험을 100% 완벽하게 반복해주지는 않는다. 사물의 체험은 한 번뿐인 것이고, 거기서 얻은 향락은 이후에 사라진다. 인간은 사물의 대용품을 계속 찾아 나선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향락을 계속 부여해줌으로써 아이의 존재를 삼켜버리는 무서운 존재가 된다. 어머니가 주는 향락은 아이를 죽인다. 상징적 아버지(아버지의 이름)는 아이에게 법을 알게 하고, 향락에서 멀어지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아이가 (상징적) 아버지가 좌지우지하는 법을 받아들이고, 또한 (현실적) 아버지가 거세의 위협을 통해 아이가 향락을 포기하도록 명령함으로써 '사물'은 아이가 살고있는 상징계에서 사라져버린다고 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는 향락의 위험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안전장치를 만드는 과정이다.
사물 체험(원초적인 만족 체험)은 더 이상 없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죽는다면 그것이 되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욕동에 이끌려 그때 맛본 만족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내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는 것 자체가 다름 아닌 거세의 본질이다. 불가능한 것에 내기를 걸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사물의 향락은 한 번으로 끝나고 사라지지만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물이 준 향락의 잔해인 대상 a의 향락은 남아 있다. 흡연, 음주, 라면과 같은 고칼로리 인스턴트 식품 섭취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이러한 죽음 욕동이 주는 작은 만족 같은 것을 일상생활에서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대상a의 향락은 잃어버린 사물이 주는 향락을 되찾기 위한 하나의 지표로 작용한다. 그리고 대상a를 실마리 삼아 만들어진 욕망의 형식을 환상이라고 한다.
욕망의 근원에 있는 것은 사물의 향락을 되찾으려는 욕망이다. 결국 욕망의 목표란 욕동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라캉은 사물을 추구하는 욕망을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사물을 추구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상징계의 법을 따름으로써 욕망의 법을 마치 없는 것처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상징계의 법은 더 이상 옛날에 맛본 향락을 가져다주지 않는 사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그것에서 멀어지게 하는 장벽이다. 욕망도 고유의 법(욕망의 법)이 있는데 상징계의 법과는 다른, 향락을 목표로 하는 법이다. 정신분석에 따르면 죄책감의 기원에 있는 것은 인간이 사물이 주는 향락을 포기했다는 꺼림칙함이다. 상징계의 법과 욕망의 법이 충돌할 때 욕망의 법을 선택하지 않으면 반드시 죄책감이 찾아온다.
대상a는 상징계와 현실계의 경계에 있는 것이다. 욕망의 법도 상징계와 현실계를 이어준다.
환상이란 상징계와 현실계를 연결시키는 어떤 형성체이다. 환상이란 욕망을 성립시키는 주체와 대상a가 결합하는 방식이다. 대상a는 욕망의 원인-대상이다. 욕망에 대한 분석은 최종적으로 대상a에 다다르게 된다. 대상a에 의하여 주체와 사물 사이에 연결이 생김으로써 어떤 일정한 만족을 얻게 된다.(대상a의 향락) 만족을 얻는 방식의 형태를 결정해주는 것이 환상이다.
환상은 미래를 향한 희망(사물을 재발견하려는 욕망)을 만드는 것과 더불어, 현재의 만족(대상a의 향락)도 창출한다. 결국 환상은 욕망과 욕동이라는 양자와 관련하여 두 가지 모두를 유지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환상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지표가 된다. 향락이야말로 인생의 의미를 지탱해 준다.
과도한 기분좋음에 빠져 하나의 향락 대상에만 의존하게 되는 것은 심적인 의존증 상태로 죽은 것과 비슷해 인생을 파괴할 수도 있다. 이에서 벗어나려면 여유(아직 최고의 기분 좋음에 이르지 않았다는 미련)를 가져야 한다.
가장 강력한 환상은 종교이다. 환상은 사는 방식 그 자체이다.
정신분석은 각각의 분석 주체가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도록 스스로 환상과 대결하여 새로운 환상을 재구축할 것을 촉구한다. 이를 환상의 횡단이라고 한다. 환상의 횡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a와 유착된 理想을 벗겨내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이상(자아 이상)으로부터 고통 받지 않기 위한 작업이다. 라캉은 자아 이상을 주체가 세계를 보는 하나의 고정된 기준점이라고 했다. 자아 이상을 버리는 것은 다른 관점으로 세계를 조망하기 위한 새로운 창틀을 발견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성급하게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지 않고 현명하게 불가능한 것과 친해지는 방식을 찾는 것이다.
신경증자는 아버지가 있어서 고통 받으며, 정신병자는 아버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라서, 도착자는 아버지가 바보처럼 생각돼서 고통을 받는다. 정신병자는 스키조프레니아(조현병)의 절대적 무질서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파라노이아(편집증)의 망상으로 자기 자신의 법을 만들려고 한다.
정신병의 임상은 망상의 구축을 도와주는 것이다. 분석가는 환자가 자신의 망상을 말하게 함으로써 안정을 유지시키며, 망상의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도착자는 성적 도착자를 의미한다.(perversion-변태) 도착자는 아버지(법을 보증하는 존재)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바보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아이가 부성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도착적이 되는 것이다.
구조적인 도착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도착적인 향락 자체는 누구라도 갖고 있다. 향락이 스며있는 일반화된 도착(콜레트 솔레르 colette soler)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
정신분석의 목표는 환자의 사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무의식에 관련된 문제로 귀결된다. 정신분석이 마지막으로 다다르는 지점은 특이한 것(특이성)이 위치하는 지점이다. 분석의 종결은 특이성에 대한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양한 고통은 결국 모든 인간이 대타자의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유래한다. 결국 정신적인 고통은 대타자의 세계가 갖는 구조에 기인하는 것이다.
최고의 행복(이상적인 행복)에 관해서 대타자는 무력하다. 그러므로 대타자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에 의지하자 않고 독자적인 행복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특이성에 기반한 행복이다. 행복이 아닌 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사는 방식이다.